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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당신의 봄 (W. 꽃단지)

당신의 봄.

Written by 꽃단지

 

 풀려가던 날씨가 마음을 바꿨다. 겨우 녹나 싶었던 땅이 바짝 얼어붙었다. 나무마다 희고 붉게 맺힌 꽃봉오리도 눈 맞춰 인사하기를 미뤘다. 그러니까, 새해 첫 비가 내리나 싶었던 오늘 까만 아스팔트 바닥 위로 빗방울 대신 하얀 눈송이가 맺힌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출근길, 눈이 내렸다. 땅 위에 내려앉았다. 까맣고 심술궂은 아스팔트 바닥은 눈이 쌓이게 두지를 않았다. 잠깐 반짝이다 사라져버린 손톱만한 눈 조각. 아침부터 하나둘씩 모여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꼬마 아이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금방 눈이 녹은 자리에 또 한 송이 눈꽃이 떨어졌다. 눈이 내렸다. 금세 녹을 걸 알면서도 계속 내렸다. 그렇게 눈이 내렸다.

 버스에 오를 때 까지도 눈은 계속되었다. 끝까지 닫히지 못한 창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찼다. 외투에 조금 더 파묻히려 애쓰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렇게 두 정거장을 지났을까, 손끝에 익숙한 진동이 느껴졌다.

 

[장그래씨, 퇴근하고 만날래요? 내가 이상으로 가죠.]

[네 대리님.]

 

 

 

 

 퇴근 시간만 되면 그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을 마무리 하자 어느새 시계는 저녁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강대리님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든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퇴근은 아직 인가 봐요?”

 

 노크에 답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물었다. 옅게 미소 짓는 그를 보며 내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를 걸쳤다.

 

“방금 끝났어요. 전화하려고 했는데. 내려갈까요?”

“여기서 얘기해도 괜찮아요.”

 

 사무실에서 얘기하자기에 할 말이라는 게 짧고 가벼운 얘기인가 했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말할 것처럼 장그래씨-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가도 입을 닫고 만다. 답지 않게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얼굴을 보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나 싶어 겁을 집어먹었다. 그렇게 망설이기를 수십 번, 나의 불안한 시선을 받으며 이번에는 정말로 말을 꺼냈다.

 

“장그래씨, 우리 그만 할까요.”

 

 사실은 이런 순간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이별을 말하는 당신은 상상 속에서처럼,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침착했다. 대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그래요. 그는 담담히 받아들이는 나를 보며 조금 놀란 듯 했다. 대리님이 떠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사무실 문을 등진 모양새라 다행이라고나 할까. 방금 전까지 연인이었던 이가 등을 돌려 멀어졌다. 그가 나가고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검토가 끝나가는 서류를 뒤적이다가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오늘 아침 문자에 새겨진 딱딱한 말투가 원망스러웠다. 둘 다 애교있는 성격이 아닌 탓에 오늘만 그런 문자를 주고받았던 것도 아닌데 정직한 문장 부호로 끝맺은 문자를 보고 있자니 괜히 속이 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에 가까이 갔다. 밝은 사무실에 있으니 어두운 밖이 잘 보이질 않았다. 유리창에 이마를 바싹 가져가 기대어 섰다. 유리의 차가운 감촉에 눈을 찡그렸다. 떠나지 못한 채 사무실 건물 아래 세워진 차가 보였다. 당신은 어디까지 다정하려고 하는 걸까. 마지막 얼굴을 마주보며 건네는 한 마디까지 나를 배려했을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을지도 알았다.

 그는 나에게 진심이 아닌 적 없었다. 내게 주는 애정이 줄어들기 시작한 뒤에도 늘 마음 구석을 더듬어 찾아낸 최선의 다정함을 선물했다. 그래서였나,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간간히 보인 웃음에도 망설임이 깃든 적 없었다. ‘당신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하는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연인으로 대리님과 마주한 그 봄 이후로,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었어도 그와 맞닿은 손끝은 여전히 봄이었다. 짧은 겨울을 지나 돌아온 계절. 나는 아직 그 봄에 살고 있지만 그는 아니었나보다. 그는 빛바랜 마음을 버렸고 나는 봄을 잃었다. 그러고 서 있은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강대리님이 떠나려는 듯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이제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좁고 깜깜한 도로를 따라 자동차 불빛이 멀어지는 게 보였다. 다시 한 번 찾아온 봄을 마주보고 서서 나는 당신과 이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