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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마지막 퇴근 (W.무화)

 

 

bgm. Þau Hafa Sloppið Undan Þunga Myrk

 

 

 

마지막 퇴근

 

* 미생 강해준 x 장그래

* 궁합도 안 보는 나이, 네 살 차이 (@1983x1987)

합작 : 4제. 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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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을 쉼 없이 내달리고 정적으로 시작된 가을을 지나 떨어지는 잎이 파삭 거리는 소리를 내며 성큼 빠르게 다가 온 한 겨울의 추위. ‘눈 온다.’ 웅성 이는 목소리 속에서 나는 그제야 달력 하나를 찢어냈다. 함박눈이었다. 창문으로 다가서자 뿌옇게 김이 서리고 불투명해진 유리창으로 눈이 달라붙었다가 금세 녹아내렸다. 펑펑 내리는 눈을 보곤 좋아라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과는 달리 적적한 표정을 짓곤 인도를 빠르게 지나치는 직장인들의 얼굴 속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이런 날은 출근도 퇴근도 고충이다이것도 결국또 다른 업무의 연속이었다.

 

장그래 씨, 지금 퇴근합니까?”

 

가을이 왔구나 하기 도 전에 겨울이었다.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발을 동동거리며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아득했다. 아직 추위를 감당하기에 몸은 가을을 타고 있었고 뼛속을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과 한기를 이겨내기에는 충분히 사계절을 몸소 겪어내지 못 했다. 아득하기만 한 멀고 억겁과 같은 시간. 고요한 시간 속에 울리는 단정한 클랙슨 소리에 외투 속을 파고들던 고개를 자라처럼 뻗었다. 그였다.

 

강대리 님.”

타세요. 집이 수색동이었죠? 어차피 지나가는 길입니다. 데려다줄게요.”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버스도 있고.”

 

얼른 타세요. 뒷사람들 기다립니다. 뒤로 차가 두 대 정도, 신호가 바뀌자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차 무리에 얼른 발걸음을 떼며 포근한 온기가 감도는 차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따뜻한 훈기가 몸을 부둥켜 감싸 안고 추위로 시큰거리는 콧등과 머리 위로 내려앉은 눈덩이를 녹이며 축축한 물기를 만들어냈다. 금방이라도 세상이 끝날 것처럼 아찔하게 떨어져 내리는 눈덩이들을 피해 움직거리던 차가 마침내 기나긴 신호대기에 걸려 오랜 시간 바퀴를 굴리지 않았고 정적인 침묵을 대신하는 바람소리만이 요란하게 트렁크를 덜컹였다.

 

날씨는 확인했습니까?”

, . 다음 주까지 내내 눈이 온다고 해서 우산은 일단 챙겼는데.”

그럼 다음 주까지 같이 퇴근하죠.”

 

부담스럽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눈이 오는 다음 주까지만 같이 퇴근해요. 저번 땜질 대신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눈앞의 시야를 가리는 눈덩이들 속에 땜질이라는 글자가 두둥실 돌아다녔다. 가장 단순한 해결책이었다. 초등학생들이나 생각했을 법한 아주 단순한 해결책. 구멍이 난 곳은 무언가로 메꿔야 한다는 것. 그러나 언제나 한발 늦은 뒤, 나는 말한 후에야 후회를 했고 오고 가는 싸늘한 눈빛과 시선들 속에 비로소 잘못된 대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순한 대답에 응해준 것은 그였다.

 

그건.”

사람들은 가끔 일면의 단순한 문제를 가지고도 돌아가며 어려운 해결책들을 내곤 하죠. 그에 반해 장 그래 씨는 가장 곧은길을 걸어가는 방법을 택한 겁니다. 그리고 난 그 해결책과 방법들이 옳다고 생각해요. 잘한 겁니다, 장그래 씨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지붕들 위에서 떨어진 눈덩이들이 폭삭 가슴에 내려앉았다. 층층이 겹으로 쌓여가는 눈들이 포근하게 마음을 채워나갔다. 대답할 수 없는 목울대가 일렁이며 침식했고 홧홧 거리며 타오를 것 같은 눈 두 덩이가 붉게 물들었다. 생각이, 감정이 끝을 치닫고 있었다. 다음 주가 지나면, 계약직은 끝이 난다. 그의 진심 어린 말들에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리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안락한 공간 속에서 벗어나자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한 추위가 온몸에 가시처럼 파고들었다. 이 추위는 언제 끝이 날까. 눈은 언제 그칠까. 그리고 눈이 그치면 비로소, 정말 끝이 나는 것일까. 이제 혼자라는 것은 날이 선 칼날처럼 느껴졌다. 언제 베일까 두렵기만 한 존재로 변해 버렸다. 2년의 시간 동안 모든 것은 변했고, 나도 변했다. 처음으로 혼자라는 외로움이 사무쳤다. 그건, 끊어지지 않는 눈발처럼 긴 고통이었다.

 

 

 


 

 

***

 

 

 

 

눈이 오는 다음 주까지만 같이 퇴근해요.’ 눈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한 겨울 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추위를 모른 채 지낸 열흘의 시간은 오늘부로 끝이 난다. 쉼 없이 몰아치다가도 바닥으로 떨어지면 사라지는 눈보라처럼 신기루 마냥 사라져 버린 열흘의 시간들이 묵묵히 소란스럽지 않게 때 탄 물건들과 함께 상자 속으로 담겼다. 제법 묵직했다. 몇 번이고 훑어보며 고쳐낸 처음으로 쓴 사업 보고서와 수십 번도 정리했던 파일 속의 무수한 자료들.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퇴근길. 쓸어내리는 손길을 따라 입구가 닫히고 상자를 품속으로 안아 들었다.

   

불을 끄자 당연한 수순처럼 암흑이 찾아왔다. 그 순간 어두컴컴한 15층 안에 홀로 서있던 비좁은 공간이 땅으로 꺼지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괜찮을 것이라고 몇 번이고 다짐했던 순간이 처참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생각처럼 되는 것은 없었다. 난 혼자였고 그리고 함께였고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래,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장그래 씨.”

 

아무것도.

 

강대리 님.”

     

오늘은 눈이 안 올 줄 알았는데 오네요. 성큼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쿵쿵 거리며 무너지는 심장소리가 들릴까 싶어 파티션 너머로 가깝게 서있는 그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고개를 돌린 그를 따라 창문을 바라보자 송이송이 떨어져 내리는 눈들이 마지막 겨울을 알리듯 천천히 녹아내렸다. 집에서 나오기 전 언뜻, 방 문 너머로 울렸던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해의 막바지 추위로 곧 다시 봄이 찾아 올 것이라는 목소리가.

 

갈까요?”

 

무겁게 팔을 짓누르던 상자를 안아 올린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한 발자국씩 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깨를 스치는 수많은 기억들이 잔해처럼 등 뒤를 따라붙었다. 홀린 것처럼 차를 타고 차창을 내리며 닿으면 녹아내리는 눈을 손안에 담아내기까지 남겨진 잔해들은 계속 꼬리표를 달고 뒤를 쫓아 왔다. 더 이상 차창을 올리지 않아도, 히터를 틀지 않아도 날씨는 따뜻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대리님.”

 

곧은 어깨를 한번, 언제나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를 한번, 짙은 눈썹을 한번, 굳건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한번. 모두 눈 안에 담아내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남길 수 있는 모든 오 감각으로 그를 남겼다. 시각으로 서 있는 모습을 담고 청각으로 기분 좋게 울리는 목소리를 남기고 후각으로 옅은 향수 냄새의 잔해를 훔치고 촉각이 상자를 건네는 손의 온기를 스치고 마지막으로 미각이 볼을 타고 입술 옆으로 흘러내리는 눈 덩어리의 물기를 핥아 내렸다. 짜기도 하고 시큼한 맛이기도 했다.


“잘 지내요, 장그래씨.”

       

그가 매캐한 연기의 잔해를 남기며 멀어지는 뒤로 인사를 고했다.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눈 덩이가 고개를 막 들려는 찰나의 꽃을 적셔 내렸다. 마침내, 비로소 마지막 퇴근이었다. 나는 퇴근을 했고, 밟혀진 수순처럼 봄은 찾아왔다. 눈이 소리 없이 볼을 스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전하지 못한 고백 역시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다정함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겨울의 끝물. 우리는 그렇게 결국, 봄의 한자락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