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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편의점 알바생 (W. 꽃단지)

 푸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작게 웃음이 터졌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보통 늦게 퇴근하는 애인을 기다릴 때는 소파에 얌전히 기대 앉아 잠든 모습이 연출되지 않던가. 그래는 현관 코앞에 쪼그리고 앉아 벽에 기댄 채 세상모르고 잠들어있었다. 거실도 아닌 현관 바로 앞까지 나와 기다린 모양이었다. 야근을 마쳤으니 출발한다는 문자에 밤길 운전 조심하라는 답장을 받은 게 겨우 10분 전의 일이다. 그새 잠이 든 건지, 기대앉은 벽에 얼굴 한 쪽이 잔뜩 눌린 게 조금만 늦게 퇴근했으면 하얗던 얼굴이 찌그러진 못난이가 될 뻔 했다.

 

그래야.”

왔어요?”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도 미동 없이 잠에만 빠져있더니 이름을 부르자 귀신같이 깬다. 그래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키를 엇비슷하게 맞추니 잠이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마주해온다. , 볼에 입을 맞췄더니 톡 터지듯 작은 웃음이 비쳤다.

 

안 자고 기다리려고 했는데.”

 

 눈꼬리가 예쁘게 휘다말고 다시 졸음을 담았다. 졸기 시작하는 그래를 침실에 데려다주고 욕실로 갔다. 닫히는 문 사이로, 곧 다시 잠들 것처럼 깜박거리는 그래가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그와의 첫 만남이 생각났다. 무역회사 원인터네셔널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 편의점 알바생 한 명을 본 날은 오늘처럼 그래가 꾸벅꾸벅 졸던 그런 날이었다.

 

 

 

 

 

 

 원인터에 입사한 뒤 처음으로 야근을 하고 돌아가는 길.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었다. 불이 꺼진 가게들 사이에서 홀로 영업 중인 편의점이 유독 눈에 띄었다. 흰색의 조명이 어디 하나 빈 구석 없이 가게 내부를 모조리 밝혔다. 편의점 계산대 앞에 앉은 남자 알바생 하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졸고 있었다. 저러다 들키면 혼이 날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길 반대편에서 부부처럼 보이는 남녀가 편의점 쪽으로 걸어왔다.

 

딸랑-

 

 가게 문 열리는 소리에 알바생이 고개를 드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바 도중 조는 알바생이 혼나건 말건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후로 퇴근할 때마다 그쪽을 흘긋거리게 되었다. 그 알바는 늘 그곳에 있었는데, 어느 날은 음료수 냉장고 쪽에서 물품을 정리하고 있었고 어느 날은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편의점 앞을 그냥 지나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내가 그를 처음 봤을 때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날에 나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문을 열 때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겨우 편의점에 들어가 물건을 사는 일일 뿐인데 왜 망설여야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에게 말을 거는 일은 편의점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는 사실이다.

 

저기요.”

 

 음료수 냉장고에서 생수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갔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싶었다. 아직도 졸고 있는 그를 불렀다. 알바생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

팔백 원입니다.”

 

 지갑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건네며 그를 살폈다.

 

장그래

 

 편의점 유니폼에 붙은 명찰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유니폼 안에 교복을 입고 있었다. 확실히 어려보이긴 했다. 하얀 얼굴에 눈길이 갔다. 잠이 덜 깬 얼굴에서 졸음이 묻어났다.

 

손님, .”

 

 우물쭈물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 여기저기 뜯어보던 것을 눈치 챘을까 화들짝 놀라 눈을 맞추자 그래는 거스름돈 이백 원을 내밀고 난처하게 쳐다봤다. 거기에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편의점을 나선 것이 시작이었다. 매일 편의점에 들려 굳이 사지 않아도 괜찮은 생수나 과자를 샀고 호칭은 어느새 학생에서 그래야, ‘손님에서 아저씨로 바뀌어있었다. 얌전한 외모와 달리 그는 어설픈 농담에 크게 웃어줄 줄 알았고 호의로 건네는 음료수나 초콜릿 따위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를 편의점에서 마지막으로 보던 날은 그래의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맥주 한 캔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능숙하게 계산하는 그래의 표정이 묘했다.

 

, 마시고 싶어?”

아니요. 저는 고등학생인데요.”

고등학생들도 많이들 마시던데.”

에이 아저씨,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죠.”

 

 보기 드물게 바른 학생이다 싶었다. 어린 학생에게 술을 권하는 나쁜 어른이 된 것 같아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러면 왜 그렇게 봐?”

그냥.”

 

 그래는 그냥이라는 말로 일단 입을 떼고는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눈으로 가게 바닥 타일 무늬를 훑었다가 나를 봤다가 천장을 봤다가 했다.

 

어른이구나 싶어서요.”

 

 

 

 편의점이든 빵집이든 알바생들은 이름표에 실제 이름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그렇게 한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편의점 명찰에 적힌 장그래라는 이름도 알바생들이 흔히 사용하는 가명인 줄로만 알았지 진짜 이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편의점 유니폼에 가려진 교복에 이름이 있을 테였지만 굳이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궁금해 해본 적이 없었고, 나이도, 연락처도, 사는 곳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희미한 관계는 그래가 편의점 알바를 그만두면서 자연스럽게 끊기게 되었다.

 

 원인터에 인턴으로 입사한 그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낙하산이니 고졸이니 하는 얘기를 듣기는 했다. 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래라는 것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의 진짜 이름이 장그래였다는 것도 원인터에서 마주치고서야 알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 같았던 그래가 거실에 나와 앉아있었다. 갈 시기를 놓친 형광등이 희미했다. 어두운 거실 조명 아래로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깊이 생각에 빠진 것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에 그 입술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들이밀었다.

 

, 아저씨.”

잠도 안자고 뭐가 그렇게 심각해?”

서류 검토 한 번 더 하려고요.”

 

 회사에서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겠다며 대리님을 그렇게 연습하더니 이상 네트웍스에 자리를 잡고 나서는 다시 아저씨 소리가 나온다. 그래는 새롭게 취직한 후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라며 설레는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마우스를 잡지 않은 왼손을 끌어다 잡고 깍지를 꼈다. 손가락 하나하나 맞물리는 감촉이 좋았다.

 

아저씨 그거 알아요?”

?”

 

 잡았던 손을 금방 놓고 이번에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등부터 손바닥, 손가락을 문지르고 두 손으로 손을 주물렀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긁어내자 간지러운 듯 몸이 움츠러들었다. 잡힌 손을 쳐다보던 그래는 눈꼬리에 웃음을 매달고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작업한 문서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편의점 알바 할 때요.”

, 알바 할 때.”

 

 손바닥이며 손등을 감싸 쥐고 있던 손가락을 손목으로 옮겨 고쳐 잡았다. 다른 손으로 손끝을 간질이다 그래의 손을 내 입가로 가져갔다. 손가락 끄트머리에 입을 맞추니 키득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작게 목을 울려 웃는 소리가 좋았다. 검지 손가락을 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

 

 손가락 끝을 살살 깨물자 그래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손가락 위로 혀를 굴렸다. 그래가 팔에 힘을 줘서 손가락을 내 입에서 뺐다. 내 손에 잡힌 손목마저 빼내려는 것을 다시 붙잡았다. 그래가 손을 몇 번 당기다 그만 두고 다시 서류를 검토했다.

 

알바할 때 뭐.”

그때부터 좋아했어요.”

 

 손을 가볍게 주무르다 혀를 내어 손바닥을 핥았다. 하얀 손바닥이 매끄럽게 젖었다. 놀란 듯 그래의 어깨가 굳었다. 혀끝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자 잔뜩 당황해서는 나를 봤다가 노트북 쪽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내게 눈을 맞춰왔다. 언뜻 보니 문서의 스크롤이 마지막에 닿아 있는 게 서류 검토는 끝난 것 같았다. 그래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왼손을 뻗어 노트북을 덮었다. -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두 뺨을 손으로 감싸고 몸을 숙여 그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래가 팔을 뻗어 허리를 껴안아왔다. 맞붙은 입술 사이로 웃음이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