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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열대야 (W. 난나)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해준그래 합작 세 번째 주제 '여름밤'으로 쓴 글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해준그래] 열대야

  와이셔츠가 그래의 몸에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체면을 차리기 위해 챙겼던 자켓은 무거운 짐이 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그래의 몸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꽉 막혀 숨을 쉬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겨우 빠져나오자마자 살겠구나 하고 숨을 쉬니 이제는 후끈한 공기가 그래의 숨통을 막았다. 오피스텔까지 걸어오는 길이 천릿길 같았다. 그래는 연달은 야근으로 인해 이미 몸이 녹초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깜깜한 밤인데도 이렇게까지 눅눅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그래를 감싸오니 그래는 더욱 지칠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열대야였다. 도통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느껴지는 잠시 동안의 시원함을 느끼려고 하던 찰나에 목적지에 도착했고 그래는 아쉽게 내려야만 했다. 물론 집에 들어가면 조금 상황이 나을 것이다. 적어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왔어요.”

  “, 늦었네.”


  해준은 그래 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는 날이 섰던 신경이 에어컨 바람에 조금이나마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불쾌지수가 연일 90에 가까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지경이니 에어컨 바람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는 자켓을 걸어두고 넥타이를 풀다가 한 군데에 오롯이 남아있는 종이 쓰레기들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 하고 아파왔다. 해준과 그래가 사는 오피스텔은 매주 수요일에서 목요일 오전까지만 종이 쓰레기를 배출할 수 있다. 지금은 목요일 밤이었다. 즉 이 쓰레기들을 버리지 않아 앞으로 1주일간 집에 쌓아놓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분명 그래가 아침에 출근을 할 때 쓰레기 버리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해준에게 말한 기억이 있었다. 그래의 말에 해준은 오늘 외근을 하기 때문에 근무지로 바로 출근을 해서 시간 여유가 있으니 자신이 버리겠다고도 했었다. 그래는 너무 더웠고, 힘들었고, 지쳤기 때문에 해준을 이해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원래부터 분리수거는 해준의 일이었다. 그래는 말이 험하게 나가려고 하는 것을 겨우 억누르고 말했다.


  “해준씨, 분명 오늘 아침에 버린다고 했잖아.”

  “지금 버리면 되지.”

  “이미 쓰레기 차 와서 수거해간 거 몰라요? 지금 못 버려.”

  “어쩔 수 없네.”


  그래는 넥타이를 풀어내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얼굴을 가리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해준은 아주 좋은 파트너지만 둘 다 사람인지라 부딪히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는 자신의 행동이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으나 투덜거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당신 저번에도 이런 적 있지 않아요? 그래도 분리수거 자기 일인데 서로 힘드니까 잘 지켜야지. 내가 이렇게 꼭 두 번 말하게 만들어.”

  “다음부터는 안 그러면 되잖아.”


  그래는 더 이상 지쳐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말그대로 탈력(脫力) 상태였다. 다음부터는 안 그런다는 사람에게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며 굳이 따지려든들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그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숨길 수 없어 그래는 한숨을 쉬고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세게 닫혔다. 그러나 그래는 굳이 정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는 차가운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분명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다. 처음으로 동거했을 때의 두근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해준이 누구도 못 들어오게 하는 집에 그래를 들였다는 것은 일종의 해준의 장벽이 해제되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그래에게만 말이다. 그래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해준이 좋았다. 힘들지만 같이 이삿짐을 나르고 나서 맥주를 한 캔씩 까서 마시며 행복해했다. 둘이 살게 되어 집에 채워 넣을 것을 위해 장을 봤고 도중에 유치한 장난을 치기도 했다. 생리적 현상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었다. 그런 기억들이 생생한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서로 짜증이 섞인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지 그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뽀송하게 씻고 돌아와 에어컨 바람을 맞으니 그래는 적어도 가슴께 무언가 뭉친 것 같은 기분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와 따서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래는 곧 생각에 빠졌다. 그래의 연애 경험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적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잘 모르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해준은 그 와중에 그래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그래의 허벅다리에 자신의 머리를 누이고 잠이 들었다. 그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고새 화가 다 풀렸으리라 짐작했나보다. 그래는 처음 보았을 때 해준이 이렇게 어리광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그래는 심각한데 해준은 반듯하게 누워 잘도 자고 있었다. 그래는 해준의 그런 모습이 괘씸해 해준의 코를 꽉 잡았다가 놓았다. 숨이 막혀 킁킁대다가 손을 놓자 다시 죽은 듯이 잠드는 해준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에어컨 바람이 그래의 뒷목을 스쳤고 선풍기도 덜덜거리며 그래에게 힘겹게 바람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렇다고 해서 해준이 싫냐, 고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그래는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가 사람을 매일매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열대야는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잠시 주춤했다가 비가 시원하게 며칠 내린 뒤 열대야는 다시 기승을 부렸다. 불쾌지수는 여전히 높았지만 그래도 저번 주보다는 견딜만했다. 그래는 지쳐서 소파도 아닌 바닥에 마치 녹은 듯 누워있었다. 차가운 바닥도 큰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현관의 도어 락이 경쾌한 음을 내며 곧 문이 열렸다. 그래는 꾸물거리며 일어나 겨우 앉았다. 해준이 한 쪽 손에 종이 쓰레기를 담았던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쓰레기 버리고 왔어.”

  “잘했어요.”


  그래는 저번 주의 자신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냥 간단한 일이고 자신도 미리 한 번 더 신경 썼으면 될 일인데 그렇게까지 화를 냈었는가. 그저 많이 힘들었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저번 주에 한 번 투덜거리고 나서 해준이 이번 주에는 오차 없이 말끔히 내다버렸으니 된 일이었다. 그런데 잘했다는 그래의 말에도 해준이 비키지 않고 똑바로 서서 그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 아저씨가 왜 저래. 그래는 어리둥절했다. 그래가 해준을 바라보자 해준은 바구니를 놓더니 슬금슬금 그래의 옆으로 파고 들어왔다. 안 그래도 더운데 달라붙으니 그래는 기겁을 하고 밀쳤으나 해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더워 죽겠는데 왜 그래요?”


  해준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는 그래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그래를 양 팔로 안더니 침대를 향해 곧장 직행했다. 그래는 발을 동동거렸으나 해준이 엄격한 표정으로 떨어진다, 라고 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골절상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푹신한 킹사이즈 침대에 내던져진 그래는 어이가 없어 몸을 세우려고 했으나 해준이 끌어안고 붙어서 그래의 몸 여기저기에 뽀뽀세례를 퍼부어서 실패로 돌아갔다. 침실은 거실과 달리 에어컨 바람이 아직 돌지 않아 더웠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해준에 그래는 항복을 했다. 칭찬해달라고 저렇게 머리를 들이미는 해준의 모습이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는 깊은 생각을 포기했다. 어차피 자신도 몸이 슬슬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냥 지금이 좋으니 됐다고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