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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夏夜 (W.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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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호외요 호외! 물 한 방울 제대로 삼키지 못한 벼들의 고개가 땅속으로 처박히고 제 허리를 숙여가며 힘겹게 뿌리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이마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말발굽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저 멀리서부터 마차를 이끌고 와 도망치듯 멀어지고 얼떨결에 그러나고의적인 모래바람을 먹은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며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땀으로 엉긴 머리카락과 모래를 거친 손바닥 위로 쓸어 담은 사람들은 바닥으로 흩뿌려진 종이 자락, 짙은 갈색의 종이를 주워들고 그저, 모래를 씹으며 울음을 삼켰다.

 

1910, 이곳은 식민지 조선. 우리는 피로 얼룩진 땅 위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짐승들이었다.

 

 

 

 

 

 

夏夜

경성au

 

 

* 미생 강해준 x 장그래

* 궁합도 안 보는 나이, 네 살 차이 (@1983x1987)

합작 : 3. 여름밤


 

 

 

 

일본에 가려 합니다.”

.”

 

타자기 굴러가는 소음이 건물을 가득 채웠다. 쉴 새 없이 빠르게 글씨를 뽑아내는 사람들의 손길이 실을 뽑아내는 누에고치처럼 징그럽게 일렁였다. 그 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며 하나하나 담아내고 마침내, 일그러지는 얼굴로 안경을 벗어낸 해준과 시선을 마주했다. 지독하게도 싫어했던, 반항했던, 동조하지 않던 서양문물이었지만 그에게만은 썩 잘 어울리는 물건이라고 장그래는 생각했다.

 

제 신념이...”

 

신념이 밥 먹여주나? 아니면, 죽은 어머니라도 돌아오게 하는 건가?”

 

분명,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받아도, 죽일 듯이 원망해도 그 무엇보다도 두렵고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은 그였다. 신념 따위로 제 하나뿐인 몸을 투신해 조국을 해방시키겠다는 그의 의지를, 신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네 몸 하나 받쳐도 나라는 알아주지 않고 해방 따위는 쉽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네 이름 석 자는 역사 책에 올라가지 조차 않고 네 신념을 옳소 하고 편을 들어 외쳐줄 이들은 하나 없다는 것을. 폭탄과 함께 온몸을 내던지며 아플 겨를도 없이, 몸이 산산조각 나며 일순간의 고통도 없이 죽어가는 그 외로운 시간을 알아주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것을 위해 제가 가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래도,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까지 어떻게 참았을까 싶을 만큼 쉴 새 없이, 많은 눈물이 그래의 눈 속에서 터져 나왔다. 홍수가 쏟아지는 것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이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을 적시고 있었다. 며칠 전 해준이 사 온 고급 카펫이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으나, 그보다도 해준은 흘러내리는 눈물이 안타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바닥으로 펑펑 쏟아져 내리는 눈물이, 종국에는 그를 눈물 속으로 잠기게만 할 것 같은 불안감으로 자꾸만 귀를 먹먹하게 하고 그의 울음소리를,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장그래,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 하나뿐인 아들을 지키려다 온몸으로 여러 다발의 총을 막아내고 총알받이가 되어 돌아가셨을 때. 그때도 그는 울지 않았었다. 누군가는 독하다 손가락질을 했고 누군가는 그의 짓이겨진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핏물을 보며 함께 울음을 삼켰다. 사실, 그는 울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총을 장전할 듯 서성이며 매섭고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는 일본 순사들이 그들을 감시했고 그 때문에 그 누구도 함께 울어주지도 못하는 조용한 장례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 어머니의 죽음에도 마음 편히 울지 못했고, 그리고 울지 않았다. 그것은 피로 얼룩진 땅 위를 기생하는 자들의 숙명이었고, 운명이었으며, 현실이었다. 조국이 해방되기 전까지 아마 영원히 지속될.

 

당신 하나쯤 그 열렬한 독립투사 안 된다고 나라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니요, 제가 죽어요. 제가 무너질 것 같아요. 다시는, 어머니를 총알받이로 쓰는 자식들이 나오질 않길 바라요. 그러니까, 이건 나를 위해서, 지금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도와주세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해준이 그를 예뻐한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기정사실이었다. 정답은 몰라도, 해답을 아는 친구입니다. 천하의 객원기자(特约记者)강해준이 어디서 때 묻은 뒷골목 고양이를 주워왔다. 이래서는 하류 기자 소리 나 듣고 제대로 된 생활할 수나 있겠냐는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분노로 가득 차 손 안에 잡히는 물건이란 물건들을 사방으로 집어던지는 사장에 꿋꿋이 맞서 결국, 이마가 찢어진 채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를 이곳으로까지 끌고 들어온 해준의 일화는 이곳에서는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해진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상황이었다. 장그래, 그를 해준이 아무리 애지중지하며 아끼고 하물며 사랑한다 해도 이마로 길게 쭉 뻗은 흉터를 보면서도 죄책감을 가지지 못할망정 또 다시 해준을 사지 끝으로 몰아넣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렇게 죽고 싶습니까? 그럼 차라리, 만세운동이나 해요. 광장에 나가서, 만세운동이나 하라고!”

아시잖아요. 만세운동 따위로 이제 일본인들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잖아요. 이제, 총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한 하등 쓸모없는 운동이 되었다는 거.”

그래서 지금 나보고 일본으로 당신을 보내라고? 이제는 함께 절벽으로 내달리자는 겁니까?”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대화 소리에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이 끔찍한 대화가 어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 어느 때보다 경직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은혜 갚겠습니다.”

무슨 수로? 갚기도 전에, 스스로 죽음 길로 걸어 들어가면서 무슨 수로 은혜를 갚는다는 겁니까.”

다시, 태어나면요.”

 

해준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보며 그는 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진짜예요.

 

그리고, 약속 지키지 못 해서 죄송합니다. 술 한 잔 하자던 약속. 다시, 태어나면 꼭 한잔해요. 우리, 함께, 같이.”

 

 

 

 

 

그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피로 얼룩진 태극기에 감싸인 그의 시신은 낡은 관 속에 누워있었다. 손의 형태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몸폭탄이 터지는 주변에 있던 이들이 겨우 시신을 수습해 이곳까지 걸음을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러니까 결국, 당신이 생각했던 결말은 이것뿐이었나. 폭탄을 품에 안고 그 춥고 시린 곳으로 스스로 뛰어내리는 방법뿐이었나. 해준은 소리 내어 울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총을 장전할 듯 서성이며 매섭고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는 일본 순사들이 그들을 감시했고 그 때문에 그 누구도 함께 울어주지도 못하는 조용한 장례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을 대신하듯 매미 소리가 울렸다. 계속해서 울음이 끊이질 않았다.

 

 

 

 

 

*

 

 

 

 

장그래‥….”

 

 

그가 떠나간 그 계절이, 여름이 싫었다. 그가 걸어가는 길을 시리게 만들었던 밤이 오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또다시 여름은 돌아왔고 밤은 매일이었다. 달을 등에 지고 걸어가던 그가 한 말만이 계속해 귓가를 맴돌았다.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우리는 모두 유죄입니다. 조국을 지켜내지 못한 죄, 조국을 원망한 죄, 조국을 사랑하지 못한 죄. 그리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보내주세요. 도와주세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창문 너머 그의 등 뒤를 드리우던 달이 천천히 산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리도록 춥던 밤이 막을 내리고 다시 더운 햇볕이 내리쬐는 새로운 아침이었다. 조막만 한 손으로 폭탄을 품에 안고 저 떠오르는 해를 보며 뛰어내렸을 그가 떠올랐다. 그 잠시간의 뼈아픈 기억을 누릴 새도 없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무수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마침내 소름 끼칠 만큼 차갑고 시린 서슬퍼런 빛을 뿜어내는 총구는 해준의 머리통을 겨냥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 죄.’

 

붉은 카펫 위로 무수한 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해준은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먼저 간 그를 대신해 끝까지 이 땅 위에 살아남아 조국이 해방되는 것을 보고 그때 편안히 눈을 감고 따라가겠다고 마지막 약속을 했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콧등을 시리게 만드는 추위가 온몸으로 습격했고 코끝을 찌르는 역한 짐승의 피 냄새가 속을 울렁였다. 종국에는 끝내, 말 못할 짐승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다시 해가 떠오른다.

 

그때 그 夏夜의 매미 울음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