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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우산 (W. 꽃단지)

[해준그래] 여름밤

by. 꽃단지

 

 

 모니터 가까이 구부렸던 몸을 폈다. 영업 2팀과 영업 3팀을 나눈 파티션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등 돌린 채 업무에 집중하는 강대리님이 보였다. 미동 없는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를 돌아보기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순간이지만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에 놀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른 팀 상사인 강대리님의 시선을 받았지만 그게 그저 곤란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장그래.”

, ?”

뭘 놀라고 그래, 업무 시간에 어딜 보느라 정신을 놓고 있어?”

 

 언제 다가오셨는지 오차장님이 등 뒤에서 말을 거신다. 그러더니 차장님의 눈길은 어깨 너머로 내가 시선을 두고 있던 방향을 따라갔다.

 

정신 놓은 것 까지는 아닙니다.”

강대리네. 저 친구 일 참 열심히 해. 크게 될 친구야.”

 

 해명해봤자 못들은 척 말을 이으시기에 부러 입술을 내밀고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내 표정을 보고 크게 웃은 차장님이 말씀하셨다. 장그래 너 야근해.

 

 

 

 

 

 

 장난으로 말씀하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갑자기 내일로 당겨진 회의 때문에 야근을 면치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15층 사람들은 하나 둘씩 퇴근해서, 내가 일을 마칠 때 즈음 사무실에 남은 것은 강대리님 뿐이었다. 차장님이 부탁하신 서류의 출력을 마친 뒤 메신저를 종료하고 컴퓨터를 껐다. 출력한 서류를 정리하고 일어나자 대리님은 퇴근을 하셨는지 이미 자리에 없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을 달래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비가 내렸다. 거리가 온통 검었다. 그 속에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 아래만 유독 밝았다. 주황색 불빛이 굵은 빗줄기를 비췄다. 야근을 마친 뒤라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비가 와서 그런지도 몰랐다. 옆 건물에서 역시 야근한 것처럼 보이는 회사원 두 명이 우산을 몸에 바싹 당겨쓰고 걸음을 빨리 했다. 그들을 제외하면 간간히 요란하게 물을 튀기며 지나가는 택시 몇 대가 다였다. 그 마저도 몇 번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춘 다음에는 보이지 않았다.

 

 쏴- 하는 빗소리를 들어보니 꽤나 거칠게 내리는 듯 했다. 그리고 보니 밤새워 내린 비가 장마의 시작이라 했던가. 아침 무렵 비가 그쳤기에 출근하면서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았는데 그게 실수였다. 막 불을 끄고 나온 사무실 책상 아래 우산을 둔 적이 있는지 떠올려보지만 역시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옷을 적시더라도 지하철역까지 곧바로 뛰어갈지 근처 편의점에 들려 일회용 우산이라도 사는 게 나을지, 아니면 그냥 그칠 때까지 기다릴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 검은 우산 하나가 내 앞에 펼쳐졌다.

 

장그래씨 우산 없습니까?”

, 강대리님.”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분명 먼저 사무실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고 퇴근했으니 당연히 먼저 퇴근 하신 줄 알았는데. 의아한 마음이 앞서 이리저리 생각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나를 빤히 쳐다보는 얼굴이 있었다. 아차, 그때서야 아직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대리님. 일기예보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같이 쓰고 가죠.”

?”

장그래씨가 방금 우산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칠 때까지 기다리려고요?”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사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까 하는 생각도 했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내 생각을 그대로 보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한심하게 보일까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얼른 그런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리님은 바로 말을 이었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버스 타니까 역까지 데려다 주겠습니다.”

.”

어서요.”

 

 듣기 좋은 목소리가 재차 말했다. 그가 한 계단 아래 내려섰다. 고갯짓으로 우산 아래에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의 옆에 서서 걸었다가는 떨림을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손끝의 미세한 움직임, 숨소리 하나하나가 그에게 전해질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래도 그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건 비 때문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하라고 시킨 사람은 없었지만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작지 않은 우산이었지만 우산 아래로 어깨가 부딪혔다. 나란히 놓이는 두 켤레 구두 아래로 찰박이는 소리가 컸다. 물방울이 구두코와 만나 이리저리 튀었다. 비에 푹 젖은 공기가 제법 축축했다. 우산 아래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차분한 목소리가 묻는다. 회사 일은 힘들지 않습니까?

 

업무를 따라가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원래 상사 일이 그렇죠. 그래도 오차장님이 잘 해주시죠?”

, 김대리님도요. 제가 서툴러서 답답해하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조급해하지 않도록 잘 이끌어주십니다.”

그래요. 오차장님 같은 좋은 상사 흔치 않아요. 김대리도 배울 점이 많은 친구고.”

 

 원인터 사원들 사이에 영업 3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우세했다. 오차장님의 신념으로 회사가 잃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두 분에 대한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분명 오차장님과 김대리님을 향한 칭찬이 맞는데 꼭 내게 칭찬하는 말로 들렸다. 괜히 부끄러워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말을 붙였다.

 

그런데 강대리님, 원래 차타고 출근 하시지 않습니까?”

 

 꺼내어 놓은 질문은 그가 내 앞에 우산을 펼치던 그 때부터 맴돌던 의문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기껏 해야 같은 사무실을 공유한다는 점 밖에 없었다. 장백기씨의 사수이고 장백기씨의 입사 동기였지만 장백기씨를 통해 이어져 있다고 하기에는 그와 나 모두 장백기씨와 그리 가까운 사이가 못 되었다. 이렇게 접점이랄 것이 없는 신입사원이 해도 좋은 질문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내놓은 물음이었다.

 

맞습니다. 오늘도 그러려고 했는데 비가 온다고 해서요.”

비가 와서 그러셨다니요?”

 

 그렇다, 아니다 정도의 대답을 예상했건만 돌아온 답은 퍽 친절했다. 멍청하게 되물었다. 빗길 운전이 번거롭니 어쩌니 하지만 그것이 굳이 차를 두고 출근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며가며 비에 옷을 적시느니 차라리 막히는 찻길 위에 머무르기를 택한다.

 

오늘 비가 올 텐데 왠지 그래씨랑 야근을 하게 될 것 같았고, 또 그래씨는 왠지 우산이 없을 것 같았고.”

?”

 

  나와 함께 우산을 쓰기 위해 차를 두고 왔다는 뜻으로 들렸다면 착각일까. 그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슴이 뛰었다. 괜한 기대 갖지 말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도 자꾸만 들뜨는 가슴이 쿵쿵 울렸다. 무슨 뜻이냐 되묻는 말에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웃어보였다. 비에 옅어진 향수 냄새가 섞였다. 손바닥에 빗방울을 받으면 이 향기를 가질 수 있을까. 아마 안 될 것이다. 나는 아직 내 마음 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 왔네요. 강대리님의 어깨가 젖었다, 내 어깨가 젖었다 하기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역에 도착했다. 도착을 알리는 짧은 문장에는, 아까의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이 여전히 없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그래요, 잘 가요. 내일 봅시다.”

 

 꾸벅 인사하고 의아함을 뒤로 한 채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철 열차 칸에 앉은 사람들 사이로 몸을 묻었다. 지하철 문이 닫혔다. 대리님의 말에 대한 의문도 집으로 가는 내내 지하철 칸 안에 함께했다.

 

 

 

 

 

 

 

 이른 아침의 영업 3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자마자 타이밍 좋게 김대리님과 오차장님이 출근하셨다.

 

오차장님, 김대리님. 안녕하십니까.”

장그래, 어제 야근했지?”

, 말씀하신 서류 정리한 건 출력해서 차장님 책상에 뒀습니다.”

퇴근은? 비도 왔는데.”

 

 김대리님이 물으셨다.

 

강대리님이 지하철역까지 씌워주셔서 옷 안 적시고 잘 들어갔습니다.”

강대리가?”

 

 오차장님이 불쑥 끼어드셨다.

 

. 오차장님 말씀대로 강대리님은 좋은 분이신 것 같습니다.”

아니야.”

? 어제는 분명히…….”

아무한테나 마음 주고 그러지 마.”

 

 마음을 주다니요? 내가 가진 마음을 차장님이 아실 리가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물었지만 오차장님은 이 대화를 더 이상 길게 끌 생각이 없으신 듯 했다. 김대리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김대리님, 오차장님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몰라도 돼, 장그래.”

 

 궁금한 마음에 의문을 담아 천과장님을 쳐다봤지만 천과장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저 웃으실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하루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원인터 건물의 마지막 계단을 내려가는데 원인터 앞에 세워진 차의 창문이 열리더니 내 이름이 들렸다.

 

 장그래씨.”

대리님 퇴근하세요?”

네 장그래씨. 괜찮으면 탈래요? 할 얘기도 있고.”

 

 할 얘기가 있다던 대리님은 도착할 때 까지 중요하거나 어려운 얘기는 꺼내지 않으셨다. 그저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 요즘 영업팀 쪽은 어떠냐는 이야기. 내가 아니어도 들을 수 것들만 물을 뿐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서 차를 세우고서야 나와 눈을 맞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원인터 앞의 나를 부를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장그래씨.”

"네 대리님.”

좋아합니다.”

 

 사실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강대리님의 시선도, 근처를 맴도는 발소리도, 나를 좋아하는 마음도. 그걸 모른 척 해 온 것은 내 마음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맞았다. 그의 마음을 그의 목소리로 확인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직 내게 마음을 온전히 주지 않았다는 것 압니다.”

 

 갑작스러울 것도 압니다. 그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를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온전히 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다. 그래서 그가 내민 손을 잡기로 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처럼만 보였다. 며칠간 연이어 내린 비로 젖은 골목 바닥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의 어깨 너머로 옆집 대문 앞에 앉은 고양이를 바라봤다. 다시 눈을 맞추자 강대리님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마음 주기로 결정하면 금방 다시 거둬가지 않을 것도 잘 알아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아직도 확신이 더 필요한 건가 싶긴 하지만 장그래씨가 신중하게 고민하는 만큼 내 마음도 소중히 생각해주겠죠.”

 

강대리님이 다시 웃어보였다. 말하는 내용은 진지한데 말투는 꽤나 가벼웠다. 웃음은 밝았고 목소리는 차분했다.

 

잘 들어가요. 내일 봅시다.”

네 강대리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좁은 골목길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봤다. 그리 크지 않은 오래된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라고는 하나 서울은 서울이었다. 별이 보일 리 없었다. 까만 어둠 귀퉁이로 주황색 가로등 빛이 겹겹이 쌓였다. 내 마음은 그가 말한 그대로였다. 좋아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지 흔들리는 나뭇잎이 바람을 보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아까 그랬듯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작게 불렀다. 

 

강대리님.”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매미 소리가 너무 컸던지, 그것도 아니면 어느 새 멀리 걸어가 버려서 부르는 소리가 닿지 못했는지 그는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부르려다 그만 두었다. 목소리를 내어 마음을 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대리님을 따라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발은 점점 빨라져서 그와 같은 속도가 되었다가, 빨리 걷다가, 어느 새 그를 향해 뛰고 있었다. 발소리를 들은 듯 강대리님이 뒤를 돌아보았다.

 

장그래씨?”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허리를 껴안자 희미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손에 잡힐 듯 했던 그 향기는 이제 내 품안에 있었다. 올해 여름, 밤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그 만남 속에는 대화가, 마음이, 그리고 애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