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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옆집 남자 (W.빙다리 핫바지)




옆집 남자


강해준X장그래


w.빙다리 핫바지


 

 


 

헐레벌떡 엘리베이터로 뛰어가는 그래의 손에는 엊그제 새로 산 넥타이가 들려있었다. 지각이다, 지각이야…! 단 한 번도, 무슨 일이든 늦는 법이 없었는데 어제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몇 번이나 잠에서 자대 깨다를 반복했더니 결국 애매한 시간에 눈을 뜨고 말았다. 그래는 낡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평소답지 않게 발을 동동 구르며 다 말리지 못한 부스스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인생 첫 면접에서 시간을 지키지 못해 낙제하고 싶지는 않았다. 낡은 아파트만큼이나 낡고 바랜 양복이 그래의 몸에 헐겁게 걸려있었다. 아버지,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그래는 본가에 계신 어머니가 다려주신 그대로 자리잡아 있는 재킷의 칼라를 빳빳하게 손바닥으로 내리누르며 심호흡을 하고, - 하고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심호흡과는 다르게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는 손길이 다다다- 다급한 소리를 내었다. 문이 거의 닫히고 그래가 급한 손길로 넥타이를 목에 둘렀을 때 문 사이로 손 하나가 턱 하고 들어왔다. 그 손마디에 깜짝 놀란 그래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옆집 남자. 바로 옆집에 살면서도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에 치여 집에 머무를 여유가 없는 저와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적었던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라 그래는 머쓱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오며 가며 멀리서 목례를 하기 바빴던 사이에도 옆집 남자는 스쳐볼 때마다 말끔했었고 이 낡은 아파트와는 어울리지 않은, 딱 봐도 고급스러운 정장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고 그래는 생각했다. 일이 바쁜지 귀에 항상 걸려있는 블루투스도 그래가 옆집 남자를 기억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의 인사하는 목소리를 오늘 듣고 나자 그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와 제 옆에 정갈한 동작으로 선 옆집 남자를 힐끔 올려다보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기가 어려웠다.

 

 

 

혼자 다 가졌네.’

 

 

 

단호한 자신감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호감과 신뢰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짝 부러운 마음이 들어 내려가는 층수를 보며 데구르르 눈을 굴리다 옆집 남자의 등장에 목에 걸고 있던 것을 잊고 있었던 넥타이를 다시 급하게 손에 쥐고 주물거렸다. 나 넥타이 맬 줄 모르지. 내가 지금 남 관찰할 땐가. 큰일이었다. 나름 면접을 위해 혹시 몰라 항상 쓰던 자동넥타이 대신 길거리에서 그나마 손때가 덜 탄 넥타이를 하나 사왔었는데제 손이 도리어 넥타이에 쓸모가 없을 줄은 몰라 이리저리 손을 엉망으로 움직이기 바빴다. 하필 들고 와도 이걸 들고 와서. 어디 들려 넥타이를 매달라 부탁할 시간도 없이 빠듯했다. 면접을 기다리면서 옆 사람에게 매달라고 할까.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그래의 얼굴이 당혹에 어려 마치 꼬마아이 같았다. 그런 그래의 앞에 커다란 손바닥이 들이 밀어졌다. 엘리베이터 문을 잡던 옆집 남자의 손이었다.

 

 

 

제가 해드릴게요.”

그게 그러니까…”

 

나쁘진 않게 매어드릴 수 있습니다.”

…”

 

게다가 옆집이잖아요.”

 

 

 

옆집 남자가 저를 모를 리가 없었는데도 그 입에서 괜히 옆집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래는 민망함에 하하하고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고민 끝에 넥타이의 꼬리를 그 하얗고 커다란 손바닥 위에 가만히 올려주며 나직하게 그럼, 잘 부탁합니다하고 흘리며 내뱉는 그래의 말에, 옆집 남자는 처음으로 제게 작은 웃음을 보였다. 웃는 얼굴도 꼭 맞춤처럼 얼굴에 걸려있어 그걸 보는 그래의 귀가 뜨거워졌다. 주저 없이 마디가 굵은 손이 움직이며 넥타이 끝을 잡아왔다.

 

 

 

맬 동안만 잠깐 가방 좀 들어줄 수 있습니까?”

, …!”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얼마 벌어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옆집 남자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짝 저보다 아래에 있는 그래의 목에 옆집 남자의 시선이 내려왔고, 그래는 어색함에 해준의 손에 눈을 두고 느리게 깜빡였다. 핏대가 오른 손이 뽀얬고 향수를 뿌렸는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그래의 콧속으로 가득 들어왔다. 괜히 목 안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래가 열심히 매만졌을 땐 매듭 흉내도 내어지지 않던 것이 옆집 남자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 몇 번에 매듭이 지어져 천천히 그래의 목으로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괜히 옆집 남자의 가방을 얌전히 앞으로 들고 있던 그래의 손 안에 힘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괜시리 긴장이 되어 손 안이 눅눅해지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표정만 보다 이런 얼굴 보니까-”

“…?”

 

색다르고 좋네요.”

“…?”

 

제 이름은 강해준입니다.”

 

 

 

이웃인데 이름 정도는 알고 있으면 좋으니까.

그래의 목까지 끌어올려 삼각형으로 예쁜 모양을 내준 손은 빳빳하게 천장 위로 솟아있던 그래의 셔츠 칼라도 다정하게 아래로 내려주기 시작했다. 그래는 말리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아- 하는 작은 탄식을 뱉으며 눈을 깜빡였다. 옆집 남자의 손등이 그래의 턱선에 가끔 스쳤다. 뒷목의 칼라를 내려주며 손이 그래의 목을 감싸오자 그래가 남자의 품에 안긴 듯한 모양새가 되어있었다. 언제부턴가 빨개져 있던 그래의 귀가 이제는 활활 불타오르는 모양새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정장 안에서는 향수와는 다른 묘한 향기가 느껴졌고 순간이지만 코끝에 가슴팍이 닿을 것 같이 가까워졌다. 미묘하게 스치는 손길과 몸에 쿵쿵 심장이 큰 소리를 내자 그래는 둘데 없는 눈을 꾸욱 감았다. 더 닿으면. 그래의 괜한 걱정을 아는지 말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떨어진 손은 그래가 쥐고 있던 제 가방을 자연스럽게 건네갔다. 그래는 마법처럼 얌전히 제 목에 걸린 넥타이를 젖은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다 잊은 것이 있었던 것처럼 급하게 말을 뱉었다.

 

 

 

…! 제 이름은, 장그래입니다. 그래할 때 그래…”

장그래.”

 

“…?”

이름, 잘 어울리네요.”

 

 

 

   마침 딱 1층에 멈춘 엘리베이터에 먼저 옆집 남자, 해준이 발을 움직였다. 반말처럼 나직이 뱉어진 제 이름에 잠깐 멍하니 넋을 놓고 서있다 그래는 그 뒤를 따라 내리며 단지 입구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구두를 살짝 스치는 남자의 바짓단 길이가 그래의 눈 안에 들어왔다. 적당히 윤이 나는 구두도, 단정한 뒷머리도, 이어 귓속에 블루투스를 끼워 넣는 손길도 모두 직장인의 정석을 보는 듯 깔끔했다. 저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그래는 제 뒷머리를 매만지며 머쓱함을 감추려다 제 앞에서 우뚝 멈추는 걸음에 따라 뚝, 발을 멈췄다. 하마터면 다시 몸이 닿을 뻔 했다는 생각이 유난히도 부끄러웠다.

 

 

 

자주 봐요, 장그래씨.”

, . …넥타이, 감사합니다.”

 

어려울 거 없으니 언제든 말해요.”

 

 

 

또 봐요.

가끔씩 건네던 목례와 함께 건네는 인사말은 아침 공기와 함께 그래에게 닿았다. 경쾌한 구두소리가 계단을 내려가고 점점 멀어지는 널찍한 뒷모습을 또다시 멍하게 바라보다, 그래는 그제서야 제가 급했다는 것을 깨닫고 헐레벌떡 뛰었다. 해준과는 반대방향의 길로 뛰는 그래의 구두소리는 설렘과 떨림의 소리를 모두 담고 있었다. 그것이 면접 때문인지 다른 일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면접이 끝나고 엄마가 계신 본가에 들렸다가 어둑해질 즈음 낡은 아파트로 향하는 그래의 발걸음은 힘이 없었다군대에 가기 전, 지인의 도움으로 입사했던 곳에서 저를 바둑을 했던 아이라는 선입견의 틀에 가두고 내려보던 시선들만큼이나 어려운 말들이 면접 때 다가왔었다. 유려하게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차분히 한 글자씩 나름 고군분투하며 내뱉었지만, 이제야 갓 걸음마 중인 자신과 어렸을 때부터 사회에 길들여진 타인과는 스스로 생각해도 비교자체가 불가였다. 쿡 누르면 술술 나오는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그래는 면접 내내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언제나처럼 심드렁하게 면접이 어땠냐고 묻는 엄마의 말에 그래는 그저 그냥 그랬다는 말만을 남겼다

 

 

 

', 엄마 그런데…'

'뭐가.'

'나 넥타이 매는 법 좀 알려주세요.'

 

 

 

낡은 아파트로 가는 길은 점점 남색빛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지금껏 겪었던 씁쓸함을 쌓아도 오늘만 못할 것 같아 그래는 절로 한숨이 걸음마다 쏟아져 나왔다. 나름 정장을 갖춰 입은 그래에게서 사회 초년생의 분위기가 흘렀다. 한바탕의 꿈처럼 다시 내일이면 또 밤낮없이 알바를 뛰며 발바닥에 불이 날게 까마득해 그래는 입술을 앙 다물고 흐느적거리던 발걸음을 애써 빨리 했다. 부족했기에 열심히 살아야만 했다. 힘이 잔뜩 들어가 흔들리는 팔 끝의 손에는 엄마에게 매는 법을 배우다 끝끝내 서로 모르는 바람에 매듭을 짓지 못하고 풀려버린 넥타이가 들려있었다. 이럴 거면 계속 매고 있을 걸. 풀려버린 매듭이 괜히 아까웠다.

 

 

 

"장그래씨."

 

 

 

발에 한껏 힘을 주고 앞으로 단지 내로 들어서려던 그래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부를 사람이 없는 데 뜬금 없이 불려지는 이름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자 목소리만큼이나 정갈한 얼굴이 들어왔다. 옆집 남자였다.

 

 

 

"아…, 퇴근하세요?"

"…면접 잘 보고 오셨습니까?"

 

"…티 나나요…?"

"평소랑 다르게 정장차림이니까."

 

 

 

혹시나 하고.

걸음을 빨리 하던 그래의 옆에 자연스럽게 와 스며든 해준은 아침과 똑같이 깔끔한 모양새였다. 아침에 서로 이름을 알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저를 다정하게 봐주는 해준의 눈동자에 오히려 그래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려왔다. 아르바이트로 바빠 보이던 저를 아마 잘 알고 있는 듯 건네오는 말에 그래는 이상하게도 오늘 하루의 피로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저를 토닥이는 것만 같았다.

 

 

 

넥타이 풀었네요.”

그러니까, 이게연습을 하다가…”

 

내가 너무 부담스럽게 매줬습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고, 매번 시간 뺏는 것도 죄송하고 또, 저 혼자 있을 때-”

 

농담입니다.”

 

 

 

또 시익-하고 올라가는 입꼬리가 밤 속에서도 유난히 돋보였다. 그래는 멍하게 아- 하는 소리를 내며 해준의 웃는 입꼬리를 한참 쳐다보다, 제 시선이 그쪽으로 닿는 걸 느꼈는지 어색하게 입가를 매만지는 하얀 손에 화들짝 앞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슬며시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입술을 몰래 꽉 깨물었다. 장난같은 건 모를 법한 얼굴로 농담이라 말하는 게 생각할수록 꽤 귀여웠다. 웃음을 참느라 덩달아 넥타이를 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집으로 오는 길 동안 엄마가 넥타이 매는 법을 모르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었던 건 아마 이 얼굴을 자주 보고 싶어서겠지 싶었다. 이웃이니까. 해준의 눈길이 그래와 나란히 걸으며 생각에 빠져있는 그래의 얼굴로 향했다. 아침에 갓 통성명을 한 사이치고는 꽤 깊은 시선이었다.

 

 

 

결과 나올 때까진 다른 일로 바쁘겠습니다.”

“…매번 하던 거라 괜찮습니다. 오히려 더 나을 지도 모르고…”

 

퇴근길 혼자 오는 거 꽤 외로웠는데 이렇게 같이 옆집 이웃하고 퇴근하니까 기분 좋네요.”

“…저도 왠지 위로 받는 것 같고 좋습니다.”

 

“… 꼭 합격해요.”

“…?”

 

그래야 퇴근시간 맞춰질 테니까.”

 

 

 

우리 계속 엇갈렸잖아요.

해준의 말에 그래의 귀 끝이 다시 발갛게 달아올랐다. 단지 내의 가로등 밑으로 지나가며 불빛에 비춰진 붉은색을 보며 해준은 미소를 지었다. 버릇일까. 아침부터 줄곧 제 앞에서 붉혔던 귀 끝이 동그래서 마냥 귀여웠다. 토끼 같기도 하고. 그런 해준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그래는 해준의 말마따나 토끼처럼 도톰한 입술을 오물조물거리며 괴롭히기 바빴다. 그 입술을 보는 해준의 눈꼬리가 사르르 달콤하게 접혀왔다.

 

시덥 잖은 얘기를 나누며 같이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언제나 혼자였던 집으로 향하는 길에 함께인 기분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어딘가 간지러운 느낌이 어색해 그래의 손은 자꾸 훵하게 드러난 뒷목을 쓸었다. 그래의 집보다 한 칸 더 복도 안쪽인 해준이 뚜벅뚜벅 걸어 제 집 도어락을 잡았다. 그래는 열쇠를 철컥이며 문을 열고는 비밀번호를 누르는 해준의 손을 빤히 바라봤다. 아침에 제 목에서 간질간질 움직이던 손에는 푸른 핏줄이 은은하게 보이고 있었다. 어떤 인사를 나눠야 할까.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장그래씨.”

, .”

 

“… 잘 자고 내일 봐요.”

강해준씨, 되게 어색하네요.”

 

편하게 해준씨라고 불러요.”

“…해준씨.”

 

“….”

쉬세요.”

 

“…그래씨도.”

 

가볍게 내린 목례와 더불어 나누는 말에는 공백이 많았다. 하지만 눈길은 여전히 맞물린 채로 드문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잠깐의 눈맞춤 후로 문을 열고 들어간 둘은 마치 약속한 것처럼 닫힌 철문에 등을 기대며 깊게 눈을 감았다. 작게 내쉬는 숨까지. 헤어짐의 인사가 이리도 아쉬웠던 것인지 깨닫는 데에는 고작 하루가 걸렸을 뿐이었다. 피로에 젖은 두 쌍의 발이 각자의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각자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비슷한 구조를 가진 서로의 집 안으로.

 

 

 

*     *     *

 

 

 

 

하루 종일 다시 아르바이트에 치인 그래는 해준과 마주할 시간이 적었다. 근 일주일을 언제 그랬냐는 듯 새벽에 나서고 다시 새벽에 들어오는 날을 정신 없이 반복하자 자연스럽게 해준의 얼굴이 흐릿해질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지쳐 집 앞으로 와 열쇠로 문을 열면서도 흘끔 옆집 대문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문을 두드릴 용기와 기회는 없었다. 아쉬운 일이었다.

 

조금 한가한 금요일의 밤, 조금은 밤의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끝마친 그래의 발걸음이 평소와는 다르게 가벼웠다. 일찍 쉬어볼까. 어쩌면 옆집 남자와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하는 소소한 생각들이 그래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둑하게 내려앉는 길을 걸으며 고민하던 그래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가로등이 별로 없는 길 위에서 휴대폰 불빛은 유난히 밝았다. 짧게 도착한 문자의 문구를 본 그래의 얼굴이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그래의 손에 들린 건 편의점 봉투였다. 봉투 안에서 맥주 캔들이 덜그럭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래, 뭐 예상한 일이었다. 당연히 떨어질 것도 예상했지만, 사람이란 언제나 미련스러운 동물이었다. 특히 저는 더욱. 포기하는 법을 그렇게 연습해왔었건만 아쉬움은 제게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제 부족한 점들이 유난히 불거져 보이는 것 같은 밤이라 잘 마시지도 않는 맥주가 오늘따라 입에 당겼다. 그래는 단지 안에 정원이라고 할 수도 없는, 초라하고 작은 풀밭 위의 벤치에 주저 앉았다. 안주는 동그란 달 하나면 충분했다. 봉투 안에서 주섬주섬 한 캔을 꺼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입구를 열곤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술이 참 달았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살살 쓸어주어 기분이 좋았다. 그래는 구름에 가렸다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달을 올려다보며 세 번째 캔을 깠다. 급하게 마신 술기운이 빈속에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초라한 아파트에 사는 자신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자신도, 이 초라한 벤치 위에 앉아 빈속을 술로 채우는 자신도 모두 괜찮았다. 술은 가끔 홀로 서려는 그래를 위로해주는 좋은 이웃과도 같았다. 열로 차오르는 숨을 쌕쌕 뱉으며 달을 보던 눈을, 들고 있던 캔으로 가져갔다. 약간 미지근해진 맥주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장그래씨?”

“……”

 

여기서 뭐합니까?”

“……”

 

“…술 많이 마셨어요?”

“…해준씨아니, 아니요.”

 

 

 

일주일 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아, 이웃이 또 있었네. 흐릿해진 얼굴이 오늘도 단정할게 분명해 그래는 눈을 깜빡이며 선명하게 얼굴을 담으려 애를 썼다. 평소보다 느린 그래의 움직임을 가만 바라보던 해준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그래의 옆자리로 가 앉고는 봉투에 든 맥주 한 캔을 꺼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래의 눈은 토끼처럼 살짝 붉어져 있었다. 퇴근길에 오랜만인 얼굴을 마주한 건 좋았지만, 평소의 그 무던한 얼굴이 아닌 또 다시 새로운 표정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밤에 눌린 모습을 보는 건 맘을 쓰라리게 했다.

 

 

 

한 캔 마셔도 됩니까?”

“…, 다 드셔도됩니다…”

 

“…속상한 일 있습니까?”

“…아뇨그냥달이 예뻐서요.”

 

 

 

어설프게 말을 돌리는 그래의 옆 얼굴을 보다 해준은 제 손에 든 미지근한 맥주를 꿀꺽 삼켰다. 바쁘게 사는 사람인 것도 알고, 애쓰는 사람인 것도 알고 있었다. 쉼 없이 발을 움직이면서 그래도 의연하게 버티려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눈에 담아두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목이 뻐근하도록 달만 올려다보는 그래를 보다 해준이 손을 뻗어 그래의 얼굴을 제게로 부드럽게 돌려왔다. 손바닥에는 경계가 와르르 무너진 초식동물처럼 뜨겁고 보드라운 뺨이 가득 기대왔다. 두 뺨을 다정하게 그러쥐고 금방이라도 울 듯 빨간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술에 취해 얼마나 가까운지 가늠도 못한 채 멍한 그래의 뜨거운 얼굴을 해준은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쓸었다. 위로가 담긴 손길에 그래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였다.

 

 

 

토끼를 닮은 건 좋은데, 울 것처럼 눈이 빨개지는 건 맘 아파서 별롭니다.”

“…토끼요…?”

앞으로 혼자 마시지 말고 같이 마셔요.”

 

 

 

뜨거운 얼굴에 비해 시원한 해준의 손길에 그래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감았다 뜨는 시간이 꽤 길자 팔랑이는 그래의 속눈썹을 보던 해준의 고개가 점점 그래에게로 가까이 갔다. 입술이 닿기 일보 직전에 입가에 닿는 숨이 뜨거워 그래가 입술을 움찔거렸다. 코끝이 스칠 듯 가까이 다가가 내리깐 눈으로 해준은 달빛을 등잔 삼아 그래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앞머리에 살짝 가린 눈썹, 곧게 뻗은 콧등, 부드러운 뺨 전부를 눈길로 쓸다, 술에 젖어 살짝 부은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해준은 가만히 그래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숨이 손가락 끝을 적셔오자 해준은 이내 몸을 떨어뜨렸다. 그리곤 벤치에 올려두었던 맥주 캔을 들어 그래의 앞에 가져갔다. 느리지만 그래의 캔도 다가와 해준의 캔과 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서로의 목 안으로 들어가는 맥주는 다 식어버려 쓴맛이 강하게 났지만 그 끝에는 이유 모를 달콤한 향기가 맴돌았다.

 

 

 

 

 

그래는 멍한 귓속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무거운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숨이 급하게 차오르고 젖은 숨을 헉헉 몸이 시키는 대로 내쉬고 있었다. 어제 어떻게 집에 들어왔더라. 씻고 잤는지도 의문이었다. 평소보다 더욱 느린 머릿속을 정리하면서도 벨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소리에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누가 돌을 얹은 듯 무거워 손 하나 까딱하기 어려워 밭은 숨만 쌕쌕 내쉬었다. 이내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장그래씨-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래의 눈에서 또르르 열로 인한 눈물이 흘렀다. - 하고 작게 대답을 해봤지만 매트리스 밖을 넘어가지도 못하고 뚝 목소리가 끊겼다.

 

 

 

장그래씨, 어제 문 잠그고 자라니까 왜어디 아파요?”

 ,…?”

 

아픕니까? 어디가 아프열 좀 봐.”

“…열려 있었어요…?”

 

어어. 잠깐만, 잠깐 있어요. 약 가지고 올게.”

“…아니에요, 그냥자면 나아질…”

 

말 하지 말고 눈 감고 있어, 장그래.”

 

 

 

화를 누르고 있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그래가 다시 방 밖으로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다시 뜨거운 눈물이 옆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제 쌀쌀한 밤에 마셨던 술기운 때문에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열을 담은 숨이 차올라 입술을 벌린 채로 어깨가 작게 들썩이며 색색 내뱉고 있자 다시 제게로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웅웅 크게 들려왔다. 오자마자 제 이마에 다시 손을 얹어 열을 확인하는 손길이 마냥 부드러웠다. 입 벌려봐. 그 말에 힘이 다 빠진 그래의 입술이 파들거리며 작게 열렸다. 그 안으로 작은 알약이 들어오고 뒷목을 받치는 단단한 손길과 함께 입가에 시원한 물이 닿았다. 기다렸다는 듯 갈증으로 젖은 목을 축이며 그래가 큰 숨을 내뱉었다. 입가로 살짝 흐른 물기를 해준이 손가락으로 훔쳐 닦아냈다.

 

 

 

“…어제 술 많이 마실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좀 많이사긴 했는데…”

“…한숨 자고 일어나요. 빈속에 약 먹이면 안 되는데 열이 심하니까 우선 자고 일어나서 죽 먹기로 하고.”

“…전 괜찮으니까가서 쉬세요.”

말하지 말고 빨리 자요.”

 

 

 

해준의 큰 손이 그래의 눈가를 덮어왔다. 그래는 시원한 느낌에 저절로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배시시 웃었다. 어두움 속에서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주는 손길에 약 기운이 천천히 돌면서 서서히 잠이 밀려왔다. 언젠가 같이 퇴근을 했던 그 순간처럼 커다란 위로가 밀려오는 잠의 틈을 파고 들어왔다.

 

그래가 눈을 떴을 땐 방안 가득 고소한 냄새가 잔뜩 풍기고 있었다. 땀으로 젖었어야할 얼굴과 목덜미가 보송거렸다. 아까보단 가벼운 몸에 선명해진 시야에는 해준이 벽에 기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살짝 뒤척이는 그래의 몸짓에 책을 덮고 다가온 해준이 다시 그래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려 열기운을 확인해왔다. 좀 괜찮습니까? 하는 말에 그래는 말 없이 그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몸을 일으키려는 그래를 도와 벽에 기대게 한 해준은 마치 자기집인 것마냥 움직이며 달그락 소리를 내며 쟁반 위에 하얀 죽을 올려왔다.

 

 

 

좀 들어요. 맛있을 지는 모르겠는데.”

“…죄송해요. 괜히 번거롭게 해드려서…”

 

속상하게 하지 말고 어서 먹어요.”

“… 잘 먹겠습니다.”

 

 

 

그래는 느린 손길로 죽을 한 입씩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입맛을 돌게 하는 고소함과 짭짤함이 기분을 좋게 했다. 아파 본 기억도 적어 언제 죽을 먹었는지 기억도 까마득했었는데 오랜만에 느끼는 것에 작게 웃음이 나왔다. 혼자 사는 동안 아프면 그렇게 서럽다던데 저는 좋은 이웃을 만나 포근하기 짝이 없었다. 그릇이 어느 정도 바닥을 드러내자 입가를 천천히 닦아오는 다정다감한 손길이 느껴졌다

 

 

 

제가 닦을 게요, 괜찮습니다.”

남자 혼자 사는 게 똑 같은 건 아는데-”

 

“…?”

왜 장그래씨가 이러면 속상한지 모르겠네요.”

 

“……”

왜 아프고 그럽니까?”

 

 

 

입술에서 눈가로 올라와 살살 쓰다듬는 손길에 열과는 다른 부끄러움의 열기가 화드득 올라와 그래의 목덜미와 얼굴을 덮었다. 어젯밤 술기운에 느꼈던 그 다정한 손길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래가 해준의 하얀 손에 시선을 뒀다 서서히 올라와 그 얼굴을 바라봤다. 단정하고 변함없는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다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보통 옆집 이웃이 이렇게 다정한 걸까. 사람 사이는 여전히 그래에게 어려웠지만 이 남자의 패턴은 너무 빠르고 부드럽게 다가와 더욱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작고 부지런해서 눈길을 뺏더니.”

“…”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시간까지 뺏네요, 장그래씨가.”

죄송합…”

 

나도 뭐 하나 뺏어도 됩니까?”

“…저는 드릴 게 하나도-”

 

있어요.”

“……”

 

장그래씨 시간.”

 

 

 

그리고 우선 이거.

해준이 천천히 다가와 열로 건조한 그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은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둔해진 몸에 느린 반응을 보이며 눈을 크게 뜨는 그래의 입술을 어젯밤과 같이 손끝으로 살살 쓸다 다시금 해준의 입술이 깊게 닿아왔다. 손과는 다르게 열만큼이나 뜨거운 혀가 그래의 작은 혀 위를 문질렀고 겁을 먹어 굳어 있는 입안을 부드럽게 쓸어왔다. 그래의 젖은 등의 티 위를 맴도는 해준의 손길에 몸이 뒤로 기울어지자 그래가 급하게 해준의 목을 팔로 감았다. 어느 새 매트리스 위에 다시 눕혀진 꼴을 하고는 해준의 상체에 더욱 눌려 짙은 키스를 받는 그래의 손이 해준의 부드러운 등쪽 티를 꾸욱 잡아왔다. 혀와 입술을 부드럽게 엉켜오는 몸짓에 쪽쪽 낯간지러운 소리들이 들려왔고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서로 급한 숨을 내쉬며 달뜬 얼굴을 마주했다. 해준은 가까이 얼굴을 마주한 채로 그래의 눈가를 다시 가만가만 다정히 쓸어주며 그래의 안색을 살폈다. 그래는 쿵쿵대는 가슴을 견디지 못하고 해준의 티를 고쳐 쥐었다.

 

 

 

“…키스하면 감기 옮는 다던데, 내가 잘 뺏어왔습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후으…”

 

“…모르겠으면 한 번 더 해요, 우리.”

 

 

 

해준의 입술이 다시 그래의 입술 위로 포개어졌다. 아까보다 더 파고 들어가려는 듯 상체로 누르며 부드럽게 그래의 뒷목을 잡고 제게로 끌어오자 그래가 파르르 떨며 다시 해준의 등에 매달렸다.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 사이에서는 젖은 소리가 자꾸 흘러나와 귀를 간지럽혔다. 방안이 점점 열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래가 감사의 표시로 과일바구니를 들고 가자 문을 열며 그래를 맞이하는 해준의 얼굴은 거짓말처럼 약한 열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새벽마다 일 나가는 거 피곤하지 않습니까?”

“…저는 남들보다 부지런해야하니까요.”

 

 

 

우연히 퇴근길에 마주한 해준과 함께 그래는 또 다시 아파트 단지 안을 나란히 걸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감질나게 마주하는 퇴근시간은 서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마치 한 집으로 향하는 듯한 모양새가 설렘을 증폭시키기 충분했다. 손은 잡고 있지 않았지만 스치는 손등이 마치 서로 잡고 있는 듯 따스한 온도를 전달해왔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함께 들어서며 해준이 고개를 내려 그래를 바라봐왔다.

 

 

 

같은 시간에 출근, 같은 시간에 퇴근.”

“…?”

 

장그래씨와 함께면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

 

난 생각보다 욕심이 많아서요.”

…”

 

오래 살기 위해 자리 잡은 아파트는 아니지만, 이젠 의미가 달라졌으니까.”

 

 

 

함께하는 퇴근이 어려우면 그냥 한 집에서 사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낯부끄러운 소리를 표정변화 없이 뱉는 해준 덕에 창피함은 오롯이 그래의 몫이 되었다. 그래는 점점 뜨거워지는 제 뒷목을 쓸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려 제가 나오길 기다리는 해준의 옆으로 섰다. 같은 층, 같은 복도 위를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 소리가 밤이라 더욱 크게 울렸다. 다시 자신의 집 문 손잡이 앞에서 그래가 열쇠를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일 때 해준이 그래의 손목을 잡아왔다.

 

 

 

술 한 잔 할래요?”

 

 

 

우리 집에서.

아직 대답도 미처 다하지 않은 그래의 손목을 끄는 해준의 손길은 자연스러웠다. 손목을 잡고 제 집 앞에서 이제는 그래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 들어가 깍지를 끼는 것에 그래는 그저 가만히 해준의 넥타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제게 매어줬던 모양처럼 깔끔한 삼각형의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옆집 남자에게 매인 것일까. 어찌되었든 이 사랑스러운 옆집 남자는 매일 매일 같은 제 하루를 특별하게 해주었다. 이 정도면 꽤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그래가 해준의 얼굴을 올려다 볼 때, 도어락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려왔다. 문을 급하게 열자마자 해준이 마저 그래의 몸을 제 집 안으로 끌었다. 아까까지의 부드러움과는 달리 조금은 급한 감이 있는 몸짓이었다. 그래의 팔을 제 목에 두르게 하고 그래의 입술로 고개를 내리 숙이는 해준의 모습이 닫히는 문 틈으로 슬며시 보이다 이내 완전히 닫히며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복도를 잔뜩 울렸다.

 

그런 그들이 원인터내셔널 같은 층에서 다시 만나 같은 시간에 언제나 반대 방향이었던 퇴근 길을, 같은 길로 걸음하게 될 거라는 건 서로 결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Keyword : 퇴근

해준그래 합작 네살차이 "엽짚 남자"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