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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함께 걷는 길 (W. 난나)

해준그래 합작 네 살 차이 네 번째 키워드 '퇴근'이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해준그래] 함께 걷는 길

  전화가 울렸다. 그래는 한 손에는 가방, 한 손에는 휴대폰 케이스 샘플을 들고 있었기에 전화를 겨우 어깨에 끼우고 받아야 했다. 발신자는 해준이었다. 그래가 퇴근할 즈음 오는 전화라니 어떤 내용일지 예상이 갔지만 그는 섣불리 판단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보다 전화가 떨어지지 않게 신경을 써야했다. 그래는 길을 가다 멈추어 가방과 휴대폰 케이스 샘플이 담겨있는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전화를 똑바로 고쳐 잡았다. 


  [미안해요, 오늘도 제 시간에 퇴근 못 할 것 같아요.]

  “오늘도 늦는다고요?”


  그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요즘 들어 해준은 제 시간에 퇴근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동기 중에서는 제일 빠르게 승진을 해 이제 과장이라는 직급을 달고 있었기에 퇴근시간에서 조금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후임들이 실수하면 해준이 수습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해준은 늦은 밤 집에 들어와 혜리의 잠든 얼굴에 뽀뽀하는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이야말로 해준이 일찍 퇴근을 하며 혜리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혜리를 데려오려고 했는데, 보기 좋게 계획이 엎어졌다. 결국 그래가 두 손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어린이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래씨, 아니 혜리 아버지 오셨어요?”

  “아, 하 선생님. 혜리 오늘 제가 데려가려고요.”

  “요즘 자주 오시네요.”


  그래는 하 선생의 말에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팔을 벌렸다. 자그마한 가방을 맨 꼬마 숙녀가 도도도 뛰어와 그래의 품에 안겼다. 그래는 짐을 잠시 바닥에 내려두고 혜리를 번쩍 안았다. 혜리는 그래의 목을 끌어안고 비비적거리다가 해준을 찾았다. 그래는 아침 식사 때 해준이 혜리를 데리러 가겠다고 약속한 것이 떠올랐다. 혜리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마 꽤나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오늘 아버지가 너무 바빠서, 아빠가 대신 왔어.”

  “회사 갔어?”

  “응, 아직 안 끝나셨대.”


  혜리는 그래의 말에 끄덕거렸다. 혜리를 내려주고 다시 가방과 쇼핑백을 들자 혜리의 손을 잡아줄 손이 남지 않았다. 그래는 고민하다가 가방을 쇼핑백에 집어넣었다. 겨우 들어간 가방 때문에 쇼핑백이 터질 것 같았지만 딸아이의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버겁게나마 쇼핑백을 한 팔로 들고 혜리의 손을 잡았다. 작고 따뜻한 손이 그래의 손을 잡아오자 그래는 쇼핑백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리는 해준이 오지 못한다는 소식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혜리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울고불고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는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 무언가 얹힌 듯 했다.

  그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혜리의 손발을 꼼꼼히 씻도록 도와주고 조금은 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원래 오늘 저녁도 해준이 차려야 했겠지만 회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에게 원망을 해봤자 소용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준이 요즘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이렇게 한두 번 당번을 빠지는 것은 이해해주기로 했다. 몇 년 전 그래가 이상에 막 자리 잡을 때 퇴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밤늦게 들어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해준은 그래를 적극 이해해주며 당번을 도맡아 했었다. 그래는 해준이 했던 것처럼 하는 것뿐이었다. 혜리는 수저를 놓고 의자에 올라 앉아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달랑거리며 그래가 밥을 주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계란 물을 입혀 구운 햄과 보글거리며 끓는 찌개 등이 상에 올라왔고 부녀의 단란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혜리야, 아버지 보고 싶지?”

  “응, 근데 아버지는 원래 바쁘잖아.”


  그래가 잘라준 김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답하는 혜리의 모습에 그래는 입이 씁쓸했다. 저 작은 아이가 떼를 쓰지도 않고 덤덤히 대답을 한다. 그리고 벌써부터 아버지들을 이해한다. 그래는 해준이 돌아오면 꼭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실 그래도 요즘 혜리만큼 해준을 오래 못 봤으니 말이다.

  부녀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도 시간이 꽤 지나서야 해준이 집에 들어왔다. 해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그래는 해준의 자켓을 받아 걸어주었다. 해준은 옷을 다 갈아입기도 전에 손부터 씻고 혜리의 방으로 향했다. 새근새근 잠든 혜리의 볼에 뽀뽀도 하고 이마를 쓸어내린 다음 이불까지 정돈해주고 해준은 방을 빠져나왔다. 해준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속상했다. 그래서 해준과 그래가 안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혜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다른 누구보다 해준의 속이 쓰렸다.


  “해준씨가 혜리 데리고 온 게 언제죠?”

  “기억도 안 나요. 요즘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서 혜리를 못 챙겼네요.”

  “혜리가 아버지는 원래 바쁘니까, 이렇게 말하는데 내가 다 마음이 그렇더라구요.”


  그래가 옆에서 잠들 때에도 해준은 도통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해준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칼퇴를 하겠다며 신신당부했다. 그래도 혜리도 그다지 해준의 발언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도 해준은 야근을 해야 했고 그래가 부랴부랴 혜리의 어린이집에 갔다. 그래는 하 선생과 어색한 인사를 또 나누어야만 했다. 혜리와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은 분명 행복했지만 혜리와 해준이 시간을 도통 같이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해준은 눈에 띄게 속상해하고 있었고 혜리도 그 어린 나이에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는 괜히 혜리의 손을 꼭 잡았다. 고사리 같은 손이 착 감겨왔다.

  그 다음 날 해준은 아예 퇴근 시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어제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해준도 마음이 아팠다. 오늘도 만약 약속을 해 놓고 혜리를 데리러 가지 못한다면,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면 해준은 스스로를 미워할 것만 같았다. 그래는 해준이 딱히 퇴근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자 당연히 바쁠 것으로 추측하고 혜리를 데리러 퇴근 하자마자 어린이집에 갔다. 그러나 그래를 맞이하는 것은 하 선생이 아니라 혜리를 번쩍 안은 해준이었다. 혜리는 오랜만에 신이 나 그래를 보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래도 웃으며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이가 안 그런 척 해도 사실은 해준을 많이 보고 싶어 했다는 걸 그래도 잘 알았다. 혜리가 품에서 내려와 한 손은 해준의 손을 잡고 한 손은 그래의 손을 잡았다. 해준과 그래는 혜리를 사이에 두고 집으로 걸어갔다. 해준과 그래가 혜리의 손을 잡고 혜리를 붕 띄워주자 혜리는 꺄르르 웃으며 날았다. 간만에 혜리가 재잘재잘 거리며 어찌나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해준과 그래는 혜리가 이렇게 말이 많은 아이였던가,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혜리가 오늘 하루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이야기했고, 둘은 혜리를 아나운서 시켜도 되겠다는 팔불출 같은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우리 공주님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함박 스테이크.”

  “그럼 그거 먹으러 갈까?”

  “네!”


  계획에도 없던 외식을 하기로 한 해준은 허락을 받듯 그래의 눈을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래가 그것을 마다할리 없었다. 셋이서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면 집에서 밥을 차려 먹는 것이든, 밖에 나가 먹는 것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혜리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음식을 먹일 수 있다는 것도 일종의 행복이었다. 들뜬 마음의 둘의 손을 잡고 흔들거리는 혜리를 보며 해준과 그래는 미소 지었다. 혜리의 팔을 다시 높이 띄우며 사랑스러운 딸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만한 행복은 또 없었다. 매일 이렇게만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둘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