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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스물여덟, 열여덟 (W. 난나)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녀와서 늦게 제출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섯번째 합작 '야근'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해준그래] 스물여덟, 열여덟

  나한테는 열 살 차이나는 형이 한 명 있다. 진짜 형은 아니고 동네에 사는 형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형은 나를 엄청 챙겼다. 형은 동생이 없었고 나는 형이 없었으니 둘이 친형제처럼 자라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엄마가 일을 나가시면 나는 거의 맨날 형과 놀았다. 사실 열 살이라는 나이 차는 그다지 좁지만은 않아서 형이 귀찮았을 수도 있는데 동네에 또래가 없는 나를 어찌나 야무지게 챙기는지 우리 엄마는 형의 말이라면 껌뻑 믿으신다. 아마 형이 공부도 엄청 잘해서 우리나라에서 제일로 좋은 학교를 간 것도 한 몫 했을 거다. 맨날 나한테 형의 반만 닮아보라고 하시니 말 다했다. 근데 엄마가 모르는 게 있다. 나도 형의 반만이라도 닮고 싶다는 거다. 형은 얼굴도 잘 생기고 마음도 착하고 공부까지 잘하니까 말이다. 누구라곤 안 닮고 싶겠는가.

  형은 이번 봄에 원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형네서는 거의 잔치를 벌였다. 원인터내셔널은 정말 좋은 회사라고 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무역회사라나 뭐라나. 근데 나는 그 회사가 그렇게 좋은 회사인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회사에서 툭하면 야근을 시키기 때문에 형을 못 본지가 꽤 되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에는 형이 너무 피곤해보여서 옆에서 형 자는 것만 보다가, 형이 침대에 끌어들여서 같이 내내 잠만 잤고 말은 거의 못 했다. 평일에 저녁을 함께 먹은 적도 손에 꼽을 수 있었다. 그만큼 형은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왔다. 회사 생활이라는 게 쉽지는 않다지만 이렇게 사람을 혹사시켜도 되나. 물론 우리 형이 너무 똑똑하고 뛰어난 인재여서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딱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형이 바쁘다면 내가 형을 보러 가면 되지! 형네 회사가 어디 있는지는 지난번에 다 들어놨고 학교 끝난 다음 지하철을 몇 정거장만 타고 가면 될 것 같았다. 이왕 든 생각을 나는 오늘 바로 실천하기로 했다.

  학교를 마치자 애들이 놀자고 했는데 나는 단호박 먹은 것처럼 거절했다. 형이 언제 퇴근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애들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원인터내셔널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어중간한 시간임에도 지하철에는 사람이 많았다. 지하철을 타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이어폰을 꽂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어서일 수도 있지만 보고 싶은 형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많이 들떠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내릴 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오고 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땅에 발을 디뎠다. 걸음이 가벼웠다. 몇 시간만 있으면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형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다.

  몇 시간을 얕잡아 본 나는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원인터내셔널의 커다란 건물 앞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가을이라 그런지 해는 빨리 지고, 아직 하복을 입은 내 팔뚝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시계를 보니 7시였다. 해는 지는데 형은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도 야근인 모양이었다. 나는 팔뚝을 문지르며 계단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는데 그 중에 형은 없었다. 사람들은 교복을 입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관심은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 적당한 무관심이 감사했다. 점점 추워오기 시작해서 나는 몸을 쪼그려 앉아보기도 하고 제자리에서 뛰어보기도 했다. 기다림이 길어진 탓에 게임을 몇 탄 하기도 했으나 형은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형에게 톡을 보내볼까 싶었으나 여기서 포기하기에는 지금까지의 기다림이 너무 아까웠다. 나는 결국 하늘이 파란색에서 주황색, 이윽고 보라색이 될 때까지 형을 기다렸다. 시계를 보기에도 지친 내가 기지개를 쭉 폈을 때 저만치에서 형의 까만 머리가 보였다. 형 말고는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언제 지루해 했냐는 듯 벌떡 일어나서 손을 마구 흔들었다. 형은 휴대폰을 보다가 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해보였다. 도통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형이라 나는 몇 시간의 기다림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뿌듯하기까지 했다. 형이 빠르게 걸어 내게 다가왔다.


  "형 안녕. 깜짝 놀랐지?"

  "너, 계속 기다린 거야?"


  뭔가 예감이 안 좋았다. 형의 표정은 그다지 반가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한숨을 쉬더니 웬일로 큰 소리를 냈다. 나한테 거의 화를 내던 형이 아니라서 나는 움츠러들고 말았다.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여기서 기다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 거야. 교복 달랑 하나 입은 애가. 게다가 밤에 위험한데 혼자 나와서는!"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왔다. 나는 형을 야근 때문에 자주 못 보니까 점점 멀어지는 거 같고, 그게 아쉬워서 형 얼굴이라도 보려고 기다렸는데 형은 내게 화만 내고. 어쩌면 이제 진짜 형은 내가 귀찮아졌을 수도 있겠다는 싶어서 무서웠다. 열 살이나 어린 철없는 애가 뭐가 좋겠어. 사실 18년 동안 챙겨줬으면 형도 오래 돌봐준 거지.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게 창피해서 꾹 참고 바닥만 쳐다보며 형의 호통을 들었다.


  "미안."


  나는 형을 뒤로하고 가방 끈을 꼭 붙잡고 역으로 향했다. 몇 걸음 걷긴 했을까 형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아플 정도였다. 내가 아파서 형 손을 뿌리치자 형은 약하게 다시 내 어깨를 잡았다.


  "혼자 가게?"


  나는 지금 말을 하면 울음이 쏟아져 나올 거 같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눈은 똑바로 뜨고 형을 쳐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이 시간에 어떻게 혼자 가."


  갑작스레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아무리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교복을 입어도 형에게는 꼬마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싫었다.


  "형은 내가 백날 천날 애기인 줄 알아?"

  "그게 아니고……."


  형도 그런 뜻이 아니었던 걸 안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아이 취급을 받으면 나는 평생 형한테는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고, 그러면서 마음은 마구 급해졌다.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형의 셔츠자락을 꾹 부여잡고 발꿈치를 들어 형과 눈높이를 맞춘 다음, 형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대었다. 형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자 당당히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래도 애기 같아?"


  형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이 들었고, 조용히 나를 응시하는 형의 모습에 겁이 덜컥 들었다. 형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머리를 쓸어 올린 다음 나를 쳐다보았다. 형의 눈빛에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형은 꽉 조여져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르더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지만 형은 내가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어깨를 감쌌다. 그러더니 내 뒤통수를 붙잡고 그대로 입술에 키스를 했다. 확실히 내가 입술만 문댔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눈을 꾹 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형이 내 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고, 나는 그 묘한 감각에 입을 살짝 벌렸는데 그 때를 틈타 형의 혀가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입천장도 훑고 막 내 입 안을 유영하는 형의 혀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흘렸다. 그렇게 진한 키스가 끝나니 내 입술 주변은 안 봐도 번들거릴 듯 했다. 형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한 번 쓸어주곤 물었다.


  "애기 맞지."


  나는 아무 생각도 안 나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던 거 같다. 정말이지, 형은 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