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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Until You Sleep (W. 난나)

벌써 여섯번째 합작이네요. 주제는 '잘자요'입니다.

BGM이 있습니다만 듣는 분에 약간 무섭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BGM_Tili tili bom (Тили Тили Бом)

잘 부탁드립니다.


 [해준그래] Until You Sleep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식이 들린 지 45일이 지났다. 예상치 못한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해…… 공룡이 멸종했던 바로 그 원인으로…… 이제까지 소행성과는 다른 규모로…… 연일 뉴스와 라디오 방송에서는 지구 멸망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를 내놓는 뉴스에 사람들은 처음에 불신했으나 하루하루 낮이 짧아지기 시작하고 각국 저명한 과학자들의 증언, 결정적으로 국가 수뇌부의 연이은 도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지구 멸망에 한 번도 대비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은 혼돈에 휩싸였다. 어디로 떠나야 좋을지 알지 못했지만 무작정 떠나는 사람들로 인해 교통은 마비되고, 대중교통은 이미 멈추었다. 사람들은 남은 물건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고 돈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는 평등하게 심판을 받는다는, 아주 오래 전에 들은 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대형 마트는 물론 작은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비상식량과 물 따위를 차지하려는 싸움이 크고 작게 일어났다. 그 가운데 부상자와 사망자도 수없이 생겨났다. 이윽고 조금이라도 식량이나 생필품이 있던 곳은 폐허 그 자체가 되었다. 깨진 형광등과 휑한 선반들, 피가 군데군데 흩뿌려져 있고 쓰레기로 가득한 곳으로 변하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는 식량을 차지하려 싸우는 대신 끼니를 줄였다. 쌀로 밥을 해 먹으려 했으나 물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물이 부족해지니 사람들은 픽픽 쓰러져 나갔다. 그래의 어머니도 그 중 하나였다. 더러워진 물로 인해 전염병에 걸린 그래의 어머니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커다란 구덩이에 묻혔다. 그곳은 누가 누군지도 알아볼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그래는 구덩이 어디에 묻힌 지도 모르는 어머니를 눈으로 찾으며 회색빛이 된 도시를 바라보았다. 멸망의 그림자가 완연했다. 뉴스에서 떠들어댔던 날짜로는 내일이 바로 소행성과의 충돌 날이었다.

  회사로 향한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어머니의 무덤이 불특정 구덩이가 된 것처럼, 자신의 무덤은 회사가 될 것이라고 그래는 은연중에 생각했다. 마지막 남은 양초를 꼭 쥐고 회사로 가는 길은 멀었다. 대중교통이 운행하지 않으니 평소보다 몇 배는 걸었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최근에는 오래 걷지 않았고, 먹은 것도 고작 건빵 몇 개라 어질했다. 하지만 그래는 계속 걸었다.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확연하게 해가 짧아진 탓에 거리는 오후 3시밖에 안 되었는데도 어둑어둑했다.

  회사로 가는 그래의 머릿속에는 원인터내셔널에 처음 들어간 날, PT를 한 날, 합격 문자를 받은 날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무 것도 없었던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이었다. 그리고 해준을 처음 만난 날. 그래는 열심히 발을 놀리다 멈칫하고 잠시 길에 섰다. 떠올리기만 해도 벅차올랐다. 단정한 머리와 짙은 눈썹, 언제나 깔끔했던 정장 차림과 그래에게 부드럽게 웃어주던 얼굴이 한꺼번에 그래의 머릿속을 해일처럼 덮쳤다. 그래는 괜히 자신의 귀를 멋쩍게 만지작거리고 계속 걸었다.

  마침내 원인터내셔널 건물이 보였다. 이전에는 마냥 위용 있는 모양새였는데 지금은 창문이 모조리 깨져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전에 쪽지를 넣어놓았던 기둥을 어루만진 그래는 회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왁자지껄한 석율의 농담과 백기의 헛웃음, 영이의 핀잔이 들려야 할 것 같은데 로비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전기가 끊긴지 오래였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래는 15층까지 계단을 통해 걸어 올라갔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회사까지 걸어온 다음 다시 15층을 오르려니 여간 힘이 들지 않은 게 아니었다. 15층에 도달하자 저절로 숨이 헉헉거렸다. 15층의 자동문은 열린 채로 멈추어 있었다. 조금 흐트러진 것 빼고 급하게 퇴근한 사람들의 짐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회사는 마치 당장이라도 그들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정말 끝인 걸까. 그래는 자신의 자리보다 해준의 책상에 먼저 들렸다. 분명 해준도 급하게 퇴근을 했을 텐데 해준의 책상은 너무나도 깔끔했다. 원래 해준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준의 온기가 남아있을 리 없는 책상을 그래는 한 번 쓸어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그래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해준은 닮고 싶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함께 술을 마시자고 했던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했는데. 사실은, 좋아했는데. 그래는 세상의 마지막 날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다면 진작 마음을 전할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해준의 자리에서 한참 서성이던 그래는 자신의 자리에도 가보기로 했다. 저 멀리 자신의 자리는 비어있지 않았다. 누군가 그래의 자리에 서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가던 그래는 그 누군가가 해준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해준은 그래가 했던 것 마냥 그래의 책상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이전보다 조금 말라서 턱 선이 날카로워지긴 했으나 여전한 정장 차림에 깔끔하고 완벽한 해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는 낮이 짧아짐과 동시에 추워진 날씨 때문에 두꺼운 기모 후드 티와 패딩 조끼를 입고 왔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이 잠시 부끄러워졌다. 애꿎은 손가락을 꾸물거리던 그래는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강 대리님 여긴 어떻게…….”

  “그래씨야말로.”

  “여기는 제 자리니까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해준은 그러네요, 라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준과 그래는 그래의 책상 아래 주저앉았다. 불빛이라고는 없어서 어두컴컴해진 회사에 촛불 두 개만 둘 앞에서 빛나고 있었다. 좁지만 둘이 붙어있으니 따뜻했다.


  “강 대리님은 이런 날에도 완벽한 정장이시네요.”


  그래는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마 해준 쪽을 바라보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피부가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해준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수의는 깔끔하게 입고 싶어서요.”


  그런 것치고는 묵직한 대답이었다. 그래는 자신의 옷차림이 부끄러워 손가락만 꼬물거렸다. 자신이 동경하던 남자는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저리도 완벽하다. 그 옆에 조금이나마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괜찮아요, 그래씨 지금 귀여우니까.”

  “귀엽……?”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하던 생각들 다 말로 할 걸 그랬어요.”


  해준의 입에서 나오는 익숙하지 않은 말에 그래는 귀가 뜨끈해졌다.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내용은 영락없는 고백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씨 귀 붉어지는 거, 이전부터 귀엽다고 생각했어요. 귀 뿐만이 아니라 다.”


  그래는 이제 얼굴까지 달아올라서 겨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다 든 생각은 오늘이 정말로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후회할 일을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해준의 책상을 쓸어내리며 하지 못했던 말들을 곱씹는 게 아니라 직접 해준에게 말하고 싶었다.


  “마지막에 대리님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수줍게 고백하는 그래의 옆얼굴이 촛불로 은은하게 빛났다. 해준은 그 말을 듣고 그래의 붉어진 귀를 감싼 다음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그래는 처음 해준의 얼굴이 다가올 때는 놀랐으나 입술이 서로 마주 닿고 편안하게 해준의 혀를 받아들였다. 마지막이라고 해서 눈물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내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책상에 남아있던 서류더미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촛불의 희미한 불빛은 강한 바람에 부질없이 꺼졌다. 해준은 그래를 바라보며 가장 다정하게 말했다.


  “잘 자요.”

  “대리님도요.”

 

  그래의 볼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