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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봄날 밤 (W. 꽃단지)

얇은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햇빛이 밝았다. 봄날의 햇살이란 짧게 들이쳐 문 언저리만 맴도는 듯 굴다가도 결국은 누운 사람의 눈가를 쪼듯이 훑고 떨어지는 것이어서, 지난밤 큰 품에 안겨 잠들었던 어린 중전은 이불에 감긴 채 눈을 찡긋거렸다. 둥근 눈머리 사이로 잡히는 주름을 따라서 옅게나마 그림자가 졌다. 귀 뒤로 넘겨버린 검은 머리칼은 얼굴을 가려주지 못했으므로 그래는 하는 수 없이 눈을 떴다. 그렇게 억지로 뜬 눈앞에는 곁에 다가 앉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해준이 있었다. 


“중전, 기침하셔야지요. 지아비가 자리를 뜨는 줄도 모르고 그리 자는 지어미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해준은 언제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이미 붉은 곤룡포를 갖추어 입은 채였다. 짐짓 비난하는 어조를 했으되 그래가 그 안에 담긴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처음 간택되어 임금의 안곁으로 입궁했을 때만 해도 굳은 표정의 임금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벌벌 떨었더랬다. 하루하루 궁궐 담장 너머로 지는 해를 눈에 새기며 지내온 그래는 이제 해준의 농담을 구분해내어 받아칠 줄 알았다. 일어나 앉은 그래가 입을 뗐다.


“잠든 지어미를 깨우지 않고 자리를 뜨려는 지아비는 또 어디에 있다 하더이까.”

“곤전께서 곤히 잠들었기로 깨우지 못했습니다.”


실로 저를 배려해서 깨우지 않았다면 굳이 미운 말을 가져다 붙일 것은 무어란 말인가. 농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는 슬며시 웃어 보이는 용안으로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중전.” 


그래가 장난스럽게 쏘아보는 눈빛을 거두고 평소처럼 단정한 표정으로 앉자 해준이 이번에는 은근한 말투로 그래를 부른다. 그래는 저를 부르는 지아비의 목소리에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슬쩍 다가온 입맞춤에 놀라 파드득 속눈썹을 떨었다. 


“전하, 보는 눈이 많사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중을 들기 위해 상궁과 어린 나인이 교태전에 들어 있었다. 그래가 그만두라는 듯 소맷자락을 붙들었고 해준은 그 손동작에 맞추어 낮게 웃었다. 젊은 부부가 입맞춤 하나를 가지고 한참 실랑이 하고 있는데 밖에서 ‘전하, 조회에 드실 시간이옵니다.’하고 나이든 내관이 그랬다. 해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니 소매 끄트머리를 쥐고 있던 그래도 덩달아 일어서는 모양새가 되었다.


“저녁에 오겠습니다. 늦거든 기다리지 말고 침수 들도록 하세요.” 


해준이 고개 숙여 입술을 한 번 더 머금었다. 붉은 입술이 맞물렸다. 금침을 갈무리 하러 들어온 애기나인 아이 하나는 그 모습을 보고도 고개를 돌릴 줄 몰랐다. 아이의 손도 발도 둥근 머리통도 모두 그래보다 작았다. 모양 없는 비녀로 곱게 쪽을 진 상궁이 아이더러 주의를 주었다. 아이는 상궁 마마님의 눈짓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제일로 높은 두 분 주인님이 마음 나누시는 모습을 똑바로 바라봐서는 안 될 일이었다. 보아도 못 본 것이다. 자리옷 차림을 한 중전은 금세 떠나버린 입술에 아쉬운 듯 붉은 소매 자락을 놓아주었다.






 업무는 쉴 새 없이 밀어닥쳤다. 해준이 마침내 붓을 내려놓고 먹을 물렸을 때는 이미 해가 넘어간 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전하께서 중궁전에 가 침수 들겠노라 연통을 넣기에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는 말이다.


“오늘은 대전에서 침수들것이니 준비하라.”


 해준의 명을 받고서 지밀상궁이 지시했다. ‘금침 내려라.’ 댕기머리 생각시 둘이 대전 안으로 바삐 사라졌다. 뒤에서 누군가와 얘기 나누던 나이든 내관이 나서서 말했다. 


“중궁전에서 나인 하나가 달려와 말하기로, 안즉 침전의 불이 꺼지지 아니했다하옵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래도 자신을 기다리고있을진데 대전에서 밤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중궁전으로 간다.”


바쁜 걸음으로 다다른 중궁전에는 역시 불이 켜져 있었다. 전각 앞에 궁인들이 시립해있었다. 중전마마께서 목욕중이시라는 상궁의 말에 해준은 여러 겹으로 닫힌 미닫이문을 차례차례 열었다. 서온돌에 들어서자 방 주인을 닮은 공기가 해준을 감쌌다.





 

"전하께서 안에 들어 계십니다."


상궁 하나가 목욕을 마친 그래에게 고했다. 그래는 종일 기다린 얼굴을 마주할 생각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벼운 문이 열리고, 그는 툭 터져나오는 웃음을 눌러야했다. 해준이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앞에 다가가 몸을 낮추고 얼굴을 들어다봤다. 처음 입궁했던 어린 그래에게는 그리도 무서워 보였었던 얼굴인데 지금은 눈 감은 이 얼굴이 마냥 잘생겨 보이기만 했다. 그래는 해준이 행여나 잠에서 깨버릴까 얼른 입김을 불어 불을 껐다. 그리고는 궁녀 아이가 미리 펴둔 금침에 해준을 누이려 허리를 붙잡았다. 나랏님의 옥체에 손을 댔다가는 목이라도 달아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을 떠올리면 꽤나 과감한 행동이다.


 같은 사내라고는 하나 끌다시피 옮길 수 밖에 없었기에 어린 중전은 지아비와의 체격 차를 여실히 느껴야만 했다. 그래가 그를 이불에 무사히 옮기고 옆자리를 차지하자 잠들었던 해준이 그 사이 깨어나 눈을 떴다. 기름 등잔이 식어버린 까만 공간에 짧은 시선이 오고 갔다. 이번에는 그래가 눈을 감았다. 옆에 누운 그래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품에 고개를 묻는 모양이 마냥 예쁘게만 보였다. 눈 감은 이의 이마에 조용히 입을 맞췄다. 어깨를 조금 더 당겨안았다. 코로 내놓는 더운 숨이 귓가를 간질였다. 입술 사이를 흐트러뜨리고 빠져나온 날숨일지도 몰랐다.


“잘 자요.”


해준은 제 중전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가 그에 답하듯 손을 꼭 붙잡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