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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엘리베이터 (W. 난나)

7번째 합작 주제는 '엘리베이터'였습니다. 정직한 제목이라 부끄럽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준그래] 엘리베이터

  넥타이만 아니었어도.

  그래는 오늘따라 손에서 헛도는 넥타이 때문에 평소보다 늦었다. 급하게 가방을 챙겨 나와 등에 땀이 나도록 달렸다.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잡으려고 보니 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 잠시만요! 그래의 다급한 외침에 엘리베이터 문은 다시 스르륵 열렸다. 그래는 헉헉거리는 숨을 겨우 갈무리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른 손은 까무잡잡하면서도 다부진 손이었다. 어디선가 봤던 손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보니 손의 주인공은 강대리였다. 그래는 해준을 보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리님.”

  정신없어 보이는 그래의 모습에 해준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 그래는 모를 테지만 그래 정수리께의 머리는 새싹처럼 불쑥 솟아있었다. 해준은 손으로 그 머리를 정돈해주는 대신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자칫하다가는 그래를 보고 계속 웃고 있는 자신을 들킬 것 같아서였다. 고층부로 가는 엘리베이터였기에 방해받지 않고 계속해서 올라갔다. 10층 쯤 다다랐을 때 해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씨.”

  “네, 네?”

  “언제 술 한 잔 해요.”

  그래는 해준의 말에 귀가 붉어져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에. 때맞춰 엘리베이터는 15층에 도착했고, 해준은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눌러 먼저 그래가 나가도록 해주었다. 마음이 급했던 그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한 다음 서둘러 뛰어 나갔다. 겨우 시간을 맞춰 영업 3팀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놓고 출근을 마치고 나니 새삼 해준이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같은 층이니 먼저 나갈 수도 있을 텐데 굳이 먼저 나가도록 배려까지 해주다니. 그래는 자신도 모르게 웃움이 새어나왔다. 지난 번 땜질 사건 이후로 해준과 심리적 거리가 많이 줄은 느낌이었다. 단순히 업무적 칭찬이라고 해도 그래는 해준에게 칭찬을 받고 심장이 콩콩거리며 뛰던 그 기분을 잊을 수 없었다. 해준이 술 한 잔 하자고 하는 말도 어쩐지 빈말이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같이 술을 마시게 되면 어쩌지? 회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빈말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상대는 해준이다.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 해준과 술을 마실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어디서 마셔야할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그런 그래를 동식이 이상하다는 듯 흘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지나갔다.

  아침부터 서두른 탓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해준과의 짧은 대화로 그래의 머릿속은 산만했다. 그러니 당연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상식의 호통으로 그래는 허둥거리며 서류를 전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를 잡고 닫힘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잠시만요, 하고 외쳤다. 그래는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열림 버튼을 꾹 눌렀다. 아침에도 본 해준이었다. 해준은 뚜벅뚜벅 걸어와 엘리베이터를 탄 다음 고맙다며 웃어보였다. 그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준이 그래가 서있는 곳으로 다가오자 그래는 긴장하고 몸을 굳혔다. 해준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그래 옆에 섰다. 해준에게서는 상쾌하지만 가볍지 않은 향이 났다. 잠시 셔츠가 스치듯 지나갔을 때 해준에게서 나던 향을 상기시키며 그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켰다. 바로 그 때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 전광판이 나가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갇힌 것이다. 그것도 해준과 단 둘이서.

  “괜찮아요, 그래씨?”

  “아, 네. 저…… 대리님은요?”

  “난 괜찮아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당혹스럽기는 둘 다 매한가지였다. 급하게 서류를 전달해야 했던 그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급하게 나오느라 핸드폰도 가져오지 않았다.

  “근데 어쩌죠, 저 핸드폰도 두고 왔어요.”

  해준이 자신의 양복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런, 저도요. 다행히 비상벨을 누르니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빨리 가보겠지만 10분은 걸린다는 대답이었다. 적어도 10분간 둘이서 이 3평 남짓한 공간에서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공포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은 설레는 마음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해준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두근거리는 자신이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그래는 자신도 모르게 귓불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어색한 침묵 속에 먼저 입을 뗀 것은 해준이었다.

  “미안해요, 그래씨.”

  “네? 왜 대리님이 사과를…….”

  “내가 열심히 기도했거든요.”

  평소에는 핵심만 쏙쏙 뽑아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이야기하던 해준이 웬일로 오늘은 수수께끼 같은 화법을 구사했다. 그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해준을 바라보았다. 해준은 아무것도 없는 엘리베이터 천장을 괜히 바라보았다.

  “그래씨랑 잘 되게 해달라고…….”

  “네?”

  “이런 상황에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단둘이 있게 돼서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콩닥거리던 심장은 이제 온몸을 울릴 것처럼 쿵쿵거렸다.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래가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의 문이 힘겹게 열렸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많이 더우셨나보네, 두 분 다 얼굴이 빨개지고.”

  그래가 해준을 슬쩍 보니 언제나 포커페이스인줄 알았던 해준의 얼굴도 뜨끈해진 자신의 얼굴처럼 붉어져있었다. 생각 외로 귀여운 면이 있구나. 그래는 흐뭇한 얼굴로 해준을 바라보다가 문득 서류를 전달하던 길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벌써 10분은 지났다. 금방 가져다드린다고 했는데!

  “대리님, 저 일단 이것부터…….”

  “아, 네. 그렇죠.”

  “그런데요, 대리님.”

  “네.”

  “대리님이 미안해하실 일이 아니에요.”

  “예?”

  그래는 해준의 표정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시는구나.

  “저도 많이 빌었거든요. 우리 둘이 잘 되게 해달라고.”

  해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서류를 전하러 달려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는 기술자의 하소연을 들으면서도 해준은 미소 지었다. 기도가 통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