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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그래] 처음 (W. 난나)

해준그래 10제 첫번째 키워드 '첫-'으로 쓴 글입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잘 부탁드려요.


[해준그래] 처음

W. 난나


  처음 해준이 그래를 접한 것은 다른 이의 소문으로부터였다. 회사에 새로운 인턴이 들어온다고 했을 때 해준은 벌써 그럴 때가 되었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자신의 밑으로 들어올 사원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때가 되면 다 정해지기 마련인 것이고 굳이 들뜰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준의 동기들은 생각이 달라 사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새로운 인턴 이야기를 한 번씩은 꼭 꺼내게 되었다. 예쁜 여자 인턴이었다면 좋겠다거나, 여자들은 일을 제대로 안 한다거나, 낙하산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거나. 주관적인 의견의 범람 속에서 해준은 묵묵히 냉이 된장국을 떠 마셨고 다시마 초무침을 씹어 삼켰을 뿐이었다. , 강해준 너는 궁금하지도 않냐. 동기의 말에 해준은 무표정 그대로를 유지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다 알게 될 텐데 뭐 어때. 동기들의 야유를 들으며 해준은 그릇을 비웠다. 저 새끼 밑에 고약한 놈 걸려라. 동기의 저주 섞인 말에도 아무래도 상관없어, 라며 대응하는 모습이 해준다웠다. 해준을 빈정상하게 하는 것에 실패한 동기들은 급속도로 흥미를 잃고 다시 자신들끼리 들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인턴들이 들어오고 나서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장소가 사내 식당에서 옥상정원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장그래 그 친구는 낙하산이라던데.”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댄다.”

  “우리 팀 인턴은 완전 엘리트야. 피티에도 완전 빠삭하고 내 생각엔 얘가 될 거 같아.”


  해준은 끊임없는 가십에서도 고요한 물처럼 믹스커피를 들이키고 있었다. 속으로는 오늘까지 보내야 할 보고서, 클라이언트에게서 올 전화, 잡혀있는 회의의 시간 등을 생각하고 있었다. 동기들은 낙하산으로 들어왔다는 인턴 장그래에 대한 일화를 통해 해준의 관심을 끌어내려 했지만 해준은 그저 고개만 몇 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실제로 보지 않은 사람에 큰 관심은 없었다. 해준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해준이 그래를 처음 보았을 때는 적잖게 놀랐다. 외모만 보았을 때는 거의 완벽한 저의 이상형이었다. 하얀 피부에 얌전하게 이마를 덮은 갈색 머리, 가는 선임에도 남자답다는 느낌은 주는 얼굴, 붉고 도톰한 입술. 하지만 외모는 외모일 뿐 업무로 만난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자리 잡을 일은 없었다. 물론 외모 덕에 다른 인턴들보다 한두 번 눈이 더 간 것은 사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모보다 장그래라는 사람의 내면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회사로 돌아올 때 끝까지 남아 일을 해내는 뚝심과 인턴 피티에서 보여줬다는 강단 있는 모습에 타인에게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해준 마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해준은 내심 그래가 철강 팀 신입으로 와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했다. 철강 팀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회사에 반드시 필요한 팀이다. 장그래라는 사람이야말로 철강 팀의 존재 이유를 알아줄 사람이 아닐까.

  몇 달 전 자신이 했던 생각을 떠올리던 해준은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래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아쉽게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같은 층을 사용하는 철강 팀과 영업팀이라는 이유로 오며가며 인사를 하는 사이정도는 되었다. 처음에는 26년간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모르게 맹하다가도 묘한 체념이 섞인 어른스러움을 보이더니, 요즘은 처음과는 다르게 아이 같은 모습도 종종 보여준다. 그래는 지금과 같이 동식이 장난을 치면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해준은 티가 나게 웃지는 않았지만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남들 앞에서 실없이 웃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해준은 커피를 마시는 척 하며 입 꼬리를 종이컵으로 가렸다. 위험했다. 마음속에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이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침의 시작은 특별하지 않았으나 예상 밖의 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배에 구멍이 났다는 소리에 해준은 자신의 후임 대신 블루투스를 택했다. 날이 선 회의실의 공기는 베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했다. 회의실을 나서는 중에 동식과 그래를 보았으나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배에 구멍이 났으면, 때우면 되지 않나요?”


  너무도 명쾌한 해답이었다. 처음부터외모 때문이라고는 했으나자신을 놀라게 하더니 이제 얼마나 더 놀랄 일이 남았을까 해준은 기대마저 되었다. 그래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즉 아무도 하지 못했던 생각의 전환으로 철강 팀의 위급상황은 수습되었다. 정답은 몰라도 해답을 아는 친구라며 상식에게 극찬을 하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분명 이 감정은 처음과는 달랐다. 해준은 칭찬에 인색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후한 편도 아니었다. 남들 앞에서 쉽사리 얼굴이 무너지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그래의 까맣고 동그란 정수리를 보고 입술이 움찔거려 입 운동을 하는 척 했다. 고맙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말을 했는데 그것이 정말 온전히 업무로서의 측면이냐고 하면 확신할 수는 없었다.

  강해준이라는 사람은 보통 이성이 우선하는 사람이다. 무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머릿속으로 생각이 끝난 말을 내뱉는다. 해준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들은 확고한 의도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해준이 여러 번 숙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말이 나올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언제 술 한 잔 해요.”


  ‘언제라는 단어는 참 편한 단어였다. 적당히 친함을 강조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부담은 덜어주는 단어였는데, 다만 해준은 정말로 그래와 술자리를 가질 의도가 있었다. 조금은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타 팀 대리의 술자리 제안을 그래는 선뜻 받아들였다. 그것이 단순히 상하관계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선택 아닌 선택이었는지, 혹은 진짜 함께 술을 마시고 싶어서였는지 해준은 알 리 없었으나 처음 그래와 술을 마신다는 것은 꽤나 들뜨는 일이었다. 보통 한 주의 마지막은 사우나로 하곤 하지만, 오늘만큼은 칼같은 퇴근과 함께 그래를 기다렸다. 급하게 서류를 제출할 일이 있었는지 단정하게 정리되었던 머리가 비쭉비쭉 서 있었다. 해준은 손을 들어 그래의 머리를 정리해 주고 나서야 자신이 한 일을 자각했다. 그래는 놀란 듯 했지만 꺼려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해준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제 손에 닿았던 촉감을 떠올렸다. 그래와 관련된 것은 모든 것이 낯설다. 이전에도 분명 해보았던 것들인데도 처음 같았다. 적당한 대포집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는데 두리번거리는 그래가 귀여워 해준은 웃음이 나왔다.


  “대리님도 이런 곳에서 술 드실 줄은 몰랐어요.”

  “나도 사람인데요.”

  “그건…… 그렇지만.”

  “왜인지 대리님은 캄캄하고 고급스러운 바에서 온더락으로 술을 드실 거 같았어요.”


  종알거리는 그래의 발간 입술을 바라보다가 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래에게 건네니 바짝 굳어 술잔을 정자세로 받았다. 해준은 편하게 받아도 된다고 했지만 굳이 고개를 돌려가며 원 샷을 하는 모습에 마냥 편하게 웃지만은 못했다. 갈 길이 멀었다.


  “대리님으은, 어떻게 그렇게 일을…… , 잘 하시는 거예여?”


  처음에는 긴장해서 무릎이 거의 직각으로 접혀 있더니 이제는 얼굴도 발그레 해지고 혀가 풀려 옹알댔다. 그래는 자기가 받는 것이 술인지 물인지도 모르고 잔이 비자마자 치켜들고 대령하는데 해준은 그 모습이 귀여워 자꾸 웃음이 푸슬푸슬 흘러나왔다. 그래를 만나고 처음 느끼게 되는 감정이 많았다. 이런 수많은 처음을 선사해준 그래에게 고마웠다. 회색빛 세상에 이렇게 많은 색이 있는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 자신도 그래에게 다양한 처음을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욕심.


 “이런 말 해보는 거 처음인데, 저 그래씨에게 관심 있습니다.”


  그래의 하얀 손끝이 붉게 물든다. 잔을 감싸고 꼼질댄다. 해준은 그래의 이렇게나 붉어진 얼굴도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