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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그래] 첫사랑일까? (W. 꽃단지)

[해준그래] 첫사랑일까?

by. 꽃단지

 

 

강대리님, 안녕하십니까.”

 

장그래씨?”

 

  외근이 있는 날이었다. 거래처 회사 건물에서 미팅이 있었으므로 거기 필요한 철강 샘플을 옮겨야 했다. 해준이 담당하는 사업이었으므로 외근을 갈 사람은 해준 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백기는 과장님의 지시로 서류 결재를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니 샘플을 차까지 옮기는 일을 할 사람도 역시 해준 밖에 없었다. 해준이 생각하기에 평소 업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백기였지만, 이런 일은 체격 좋은 신입이 맡아서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해준이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봤자, 업무로 자리를 뜬 부사수가 당장에 나타날 리는 없는 일이었다.

 

  큰 상자를 껴안은 채 15층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해준은 열린 문 사이로 영업 3팀의 신입을 마주했다. 그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상사를 만날 줄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래는 금방 밝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강대리님, 안녕하십니까.”

 

저를 알고 먼저 인사해오는 이의 이름을 알지 못했기에 해준은 목에 걸린 사원증을 급히 눈으로 더듬었다.

 

장그래. 원인터네셔널.’

 

장그래씨?”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 그래는 해준의 팔에 가득 들린 짐을 보고는 서둘러서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해준은 그가 내리기를 기다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래는 해준이 타기 편하도록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다가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해준은 그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시선은 해준의 양 팔 가득 안긴 상자에 가 있었다. 상자 안에는 철강팀 사업과 관련된 온갖 샘플들이 종류와 규격 별로 정리되어있었다. 그러니 철강팀 일을 해본 적 없는 그래가 언뜻 보기에도 무게가 제법 되어 보인 것이다.

 

혼자 드시기에 무거울 것 같아서요.”

 

…….”

 

아 저그게, 대리님이 못하실 것 같다는 게 아니라 힘드실 것 같아서 도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해준이 별다른 대답 없이 쳐다보자, 행여나 자신의 말이 오해를 샀을까 싶었던 그래가 해명했다. 주저하며 머뭇거리더니 분명하게 제 의도를 설명해오는 모습은 분명한 사회초년생의 그것이었다. 그 모습이 제 입사 초기 모습을 떠올리게 한 것일까, 해준이 저도 모르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압니다.”

 

도와드릴까요?”

 

  제 말이 오해받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해준의 말에 그래가 재차 물었다. 철강 샘플을 옮기는 것은 혼자 하기에 조금 버겁긴 하지만 굳이 오늘 처음 만난 다른 팀 사원의 손을 빌릴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해준은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건네받은 호의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래가 멋쩍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고마워요.”

 

  고개를 들던 그래와 눈을 맞춘 해준이 슬핏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가 멋쩍은 웃음을 되돌렸다. 곧 문이 닫혔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해준은 예의 바른 신입사원과의 만남을 곱씹었다. 웃으면서 인사하는 것이며 저를 돕겠다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것 하며 어디 하나 모난 데가 없었다. 처음 말을 섞는 사람에게 친절을 건네는 부끄러움 때문인지 몰라도 붉어진 귓불이 눈에 띄었다.

 

  이번에는 동식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장그래가 얼마나 똘똘한 줄 알아? 그 어려운 무역 용어도 금방 외운다고.’

 

너희 다 들었지? 우리 애 한 건 한 거? 우리 신입이 이렇다니까?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을 턱턱 내놓잖아.’

 

, 이런 신입이 어딨냐? 강해준, 너 솔직히 부럽지?’

 

  동기 끼리 술자리를 가지거나 둘 셋씩 모여 커피 한 잔 마시는 그 때마다 동식이 빠뜨리지 않고 늘어놓던 말들이다. 해준은 그의 신입 자랑이 헛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영업 3팀의 막내는 확실히 괜찮은 사람이다. 느낌 좋은 사람과의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어쩐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랬으면 좋겠다. 해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 팔에 들린 짐의 무거움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가 다시 되짚어 생각했다. 친절한 목소리, 차분한 미소, 달아오른 귓불. 떠올리던 해준이 가만히 웃었다.

 

 

 

  해준의 동기인 동식의 부사수라는 것, 또는 해준의 부사수인 백기의 입사 동기라는 것. 그래는 그것 외에 해준과 그다지 접점이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입사와 동시에 워낙 사내에 화제가 되어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얼굴은 알지 못했다. 성격도 목소리도, 아는 것이 없었다. 몇 번이고 스쳐 지나가도 기억하지 못했을 그런 사람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같은 사무실을 쓰니 가까이 걸음 했던 일은 한두 번이 아니리라. 그동안 해준이 알지 못했던 그래는 그 날 이후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닌 말실수로 상식과 동식에게 놀림 당하는 모습, 복사할 종이를 들고 사무실을 가로질러 바삐 걸어가는 모습, 영이와 웃으며 탕비실에서 나오는 모습까지. 해준은 제가 어느 날 부터인가 눈으로 그래 뒤를 좇고 있다고 느꼈다. 실수 때문에 동식에게 혼난 그래에게 말을 건 것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장그래, 정신 안 차릴래?”

 

죄송합니다.”

 

이거 어떡할 거야, ?”

 

  영업 3팀이 있는 회의실에서는 아침부터 큰 소리가 나고야 말았다. 그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하다 사과할 뿐이었다. 그걸 보는 동식은 제 입으로 싫은 소리를 하고도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고개 숙인 그래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탓이다. 그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기에 더 그랬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그래는 제 부하직원이기 이전에 마냥 동생처럼 보듬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거 이따가 회의 계속 할 거니까 다시 고쳐놔.”

 

.”

 

  그래의 대답을 들은 동식은 한숨을 쉬며 탕비실로 멀어졌다. 동식이 저를 얼마나 아끼는지 아는 그래도, 제가 큰 소리를 들었다는 속상함보다는 저를 혼내야 했을 동식에 대해 안타까운 생각이 컸다.

 

장그래씨, 무슨 일입니까?”

 

  동식이 자리를 뜨자마자 다가온 해준이 말을 걸었다. 마침 회의실 앞을 지나가다가 그래가 꾸지람 듣는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하게 된 것이다. 평소였다면 다른 팀 신입이 혼 좀 난다고 해서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을 해준이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해준은 평소 온화하고 유쾌한 성격의 동식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아서 그런 것일 거라고 단정 지었다.

 

강대리님. 보셨네요.”

 

말해 봐요. 무슨 일인데 김대리가 화를 다 냅니까?”

 

제가 자료 정리를 잘못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 때문에 회의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 그래요? 저렇게 화냈지만 김대리도 마음 안 좋을 겁니다. 그래씨도 알죠?”

예 압니다.”

 

  그래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씨를 많이 아끼는 사람이니까 분명히 그럴 거예요.”

 

어디 봐요.”

 

해준이 그래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갔다.

 

 “대리님, 그냥 제가

 

그래는 제가 하겠다며 서류를 다시 받아가려고 손을 내밀었다.

 

여기 이 부분이 잘못됐네요. 맞죠?”

 

  서류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던 해준이 한 부분을 짚었다. 해준이 틀린 곳을 가르쳐주자, 제가 하겠다던 그래가 도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밀고 눈을 반짝이며 쳐다본다.

 

. 거기서 회의가 중단됐는데

 

. 장그래씨가 참고한 자료, 영업 3팀에 있던 출력물이죠? 그게 2년 전 자료라 지금이랑 상황이 많이 다를 겁니다.”

 

그러면 최근 자료를 찾아봐야겠네요?”

 

그렇죠, 사내 인트라넷에 아마 더 최근에 작성된 자료가 있을 겁니다. 자료랑 대조해보고 수정하세요.”

 

.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쪽. 여기는 틀리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정리해 두는 것 보다는 환율을, 이렇게 적용해서 적어두는 편이 나을 겁니다.”

 

 틀린 부분을 가르쳐주고 난 뒤, 해준이 덧붙여서 말했다. 해준은 서류를 다시 그래에게 넘겨주었다. 서류를 받아 제가 방금 설명한 부분을 적는 그래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삼켰다.

 

 

 

 

 

  복사할 자료를 들고 사무실을 지나가던 그래는 막 자동문 밖으로 나가던 해준을 발견했다. 해준은 파일로 분류된 서류를 잔뜩 쌓아서 들고 있었다. 가볍게 고개 숙이며 말을 걸었다.

 

강대리님, 오늘도 야근하십니까?”

 

, 장그래씨. 오늘 장백기씨가 월차라서 그렇게 됐습니다. 장그래씨는요?”

 

보고서 정리가 좀 남았었는데 다 했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 회의에 쓸 자료만 복사해두고 퇴근하면 됩니다.”

 

그래요, 수고해요.”

 

. 대리님도 수고하십시오.”

 

해준은 말을 마치고 뒤돌아섰다.

 

강대리님.”

 

  엘리베이터를 향해 몇 걸음 걸었을까, 망설이던 그래가 해준을 불러세웠다. 해준이 멈춰 서서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도와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해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몇 주 전의 그날과 같은 대화에 같은 행동이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해준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 앞에 다가섰다. 거의 모든 이가 퇴근한 시각, 엘리베이터를 오래 잡고 있을 이도, 꼭대기 층에 엘리베이터가 세워져 있을 이유도 없었다. 1층에 얌전히 있던 엘리베이터가 해준이 있는 15층까지 오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해준이 몸을 실었다. 그때, 복사하기 위해 자리를 뜬 줄 알았던 그래가 열린 문 사이로 불쑥 들어왔다.

 

강대리님, 그거 이리 주세요.”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서류를 반이나 빼앗아 들었다.

 

장그래씨?”

 

해준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몇 층으로 갈까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그래를 바라보던 해준은 졌다는 듯 마주 웃어주었다. 그래는 웃음 지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해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그래의 얼굴은 웃는 표정 그대로였지만 마음은 달랐다.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뿌듯함과 해준이 제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기쁨에 마음이 빛났다. 그래는 해준의 웃는 얼굴을 보던 그 순간 제 안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김대리님이나 오차장님이 제 도움을 필요로 할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그래는 제가 방금 해준에게 느낀 감정을 사랑으로 분류했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 그 안에는 해준을 볼 때 제가 짓는 미소와 해준과 나눴던 대화, 어느 날 그와 눈을 맞추던 순간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있었다. 더 나아가 그와 이야기 할 때 등 뒤를 지나가던 사람의 구둣발 소리까지 모조리 들어있었다.

 

  어느 새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해준은 그래의 한 걸음 앞에서 앞서 걸었다. 둘은 서류 보관 창고에 들어섰다. 해준의 옆에 서서 서류를 꽂아 넣으며 그래는 그의 옆얼굴을 힐끔 힐끔 돌아보았다.

 

대리님.”

 

.”

 

좋아합니다.”

 

  그래는 저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장그래씨.”

 

  해준의 표정이 굳었다. 해준이 제가 들고 있던 마지막 서류 파일을 정리하고 그래를 향해 돌아섰다. 그래는 알 수 없었다. 그 얼굴이 뜻하는 것이 놀라움인지 당혹스러움인지. 그것도 아니면 어떤 기쁨일지 조차 알 수 없었다. 해준과 부쩍 가까워졌다고 느끼지만 저 혼자만의 착각인지 서로 가까운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백기나 다른 사원들을 대하는 것과 태도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거기에 기대를 걸어보면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16층 높이까지 솟았다가도, 저와 같은 마음일까 생각해보면 금새 또 자신감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그래도 말을 꺼냈으니 오늘은 꼭 말해야 했다. 굳은 해준의 표정에 겁먹은 그래는 눈을 꼭 감고 털어내듯이 내뱉었다.

 

회사에서의 강대리님, 부하직원인 저에게 잘 해주시는 강대리님을 좋아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근처에 대리님이 있는지 돌아보기 시작했고 매일 대리님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강해준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다급하게 마음을 전하던 그래는 여기까지 말하고 해준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나 무례하진 않았을까, 불편하게 여기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숨을 몰아쉬었다.

 

  제 반응이 어떨지 불안해하고 있을 그래를 바라보며 해준의 가슴 속에 물결이 일었다. 그래가 저를 좋아하는 마음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저 작은 사람이 저를 좋아하고 있단다. 그것을 확신하게 된 순간의 기쁨은 해준이 아니라면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해준이 왼손을 들어 앞에 서있는 그래의 오른쪽 손목을 감싸 잡았다.

 

장그래씨.”

 

, 대리님.”

 

나는 말입니다, 장그래씨랑 얘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

 

  완곡한 거절일까, 그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해준에게 고백하던 방금 전 처럼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손을 빼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떤 말이 돌아오든 대답은 꼭 들어야 했다. 그래씨는 승부사 같아요. 영이의 말이 떠올랐다. 아니, 여기서 승부사의 성격이 나와서는 안 되었다. 그래는 해준의 대답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해준이 그래의 양 볼을 감쌌다. 눈가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손길에 그래가 살그머니 눈을 떴다.

 

그래씨가 나를 보는 반짝이는 눈빛이 꼭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요.”

 

…….”

 

나랑 만나보지 않을래요? 내가 다정한 사람은 못 돼도 그래씨한테 잘 할 자신은 있습니다.”

 

강대리님.”

 

어때요. 나랑 연애 해보지 않겠습니까?”

 

  해준이 가만히 눈을 맞췄다. 깊은 눈이 휘어지며 웃음을 선물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하지 않은 그래는 사람을 많이 만나 보지를 못했다. 당연히 이렇게 마음을 듬뿍 주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었다. 낯설었다. 낯설었고 설레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눈을 깜박이다 조심스럽게 눈을 맞췄다. 해준의 다정한 눈이 말했다. 당신은 사랑받고 있다고, 사랑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그래가 베시시 웃었다. 예쁘게 휘어지는 눈꼬리에 해준이 입 맞췄다.

 

 

 

 

  점심시간, 신입들이 한 자리에 함께했다. 좋건 싫건 모두들 자신들의 팀 상사들과 식사하는 일이 많았으니 넷이 모두 모인 건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우리 소시오…! 아니, 성대리한테….

 

  석율이 밥을 먹다 말고 열변을 토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의 온 신경은 방금 조용히 울린 카톡 알림에 가 있었다. 스마트폰 액정 너머에 누가 있기에 실실 웃으며 들여다보는 것이었을까, 그래에게 눈길이 닿은 석율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벌써 다섯 번째 듣는 얘기에 흥미를 잃고 묵묵히 밥을 먹던 백기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들어주던 영이도, 갑자기 말을 멈추는 석율의 행동에 그래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래가 고개를 들었다. 여섯 개의 눈이 저를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래의 귀가 조금 붉게 물들었다.

 

, 왜들 그러십니까?”

 

 그래가 말을 더듬었다. 말을 신중히 가려 하면 했지 당황하는 모습은 자주 보여주지 않던 그래였다. 동기들의 눈에 흥미가 어렸다.

 

장그래씨, 요즘 만나는 사람 있죠?”

 

?”

 

영이의 돌직구에 그래가 얼빠진 얼굴을 해 보였다.

 

에이, 빼지 말고요. 자꾸 실실 웃고 다니고, 전에는 안 그러더니 틈날 때마다 계속 휴대폰만 쳐다보고.”

 

맞아 장그래. 설마 장그래도 스마트폰 중독이야? 아니면 역시 애인인가?”

 

  백기와 석율까지 거들고 나섰다. 요 며칠 들어 그래는 탕비실에 자주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진행하던 사업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므로 영업 3팀은 한가할 것이 뻔했고, 그 말은 곧 그래도 한가하다는 뜻이었다. 탕비실은 신입사원들이 숨 돌릴 몇 안 되는 장소였다. 동기들은 그래가 바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탕비실에 나타나지 않는 원인이 연애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 사실 연애합니다.”

 

  그래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제가 연애를 하고 있다고 직접 입 밖으로 내어 말하는 것은 그래에게 생각보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의 귓불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그래의 순진한 반응을 보며 석율과 영이, 백기는 그래가 연애를 하는 것이 처음이리라 짐작했다.

 

장그래, 혹시 연애 처음이야?”

 

 석율의 질문을 받은 그래가 그렇다고 대답하기 위해 막 입을 열었을 때, 영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장그래씨 그거 알아요?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는데.”

 

, 우리 그래 마음 아파서 어떡해.”

 

  석율이 온갖 안쓰러운 표정을 다 지으며 그래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백기는 영이와 석율의 장난에 입 꼬리를 씰룩이며 웃다가 따라서 한 마디 던졌다.

 

, 맞아요. 저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네요. 장그래씨, 진짜 첫사랑이에요?”

 

붉게 물들어가던 그래의 얼굴이 도로 하얗게 되었다.

 

무슨, 첫사랑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면 뭐해, 첫사랑인거 이미 다 들켰는데. 석율은 속으로 혀를 차며 웃어보였다. 영이와 백기도 따라 웃었다.

 

 

 

 

 

  미신은 믿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누구나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찝찝해하지 않던가.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는 해준과 첫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일에 집중하지 못했고 결국 그 날 야근을 했다.

 

[그래씨, 언제 끝나요? 같이 퇴근하고싶은데.]

 

[대리님 저 야근이에요 먼저 퇴근하세요ㅠㅠ]

 

[끝나고 데려다줄게요.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해요.]

 

 해준은 주고받은 문자를 보며 쿡쿡 웃었다. 먼저 퇴근하라며 보낸 우는 얼굴의 이모티콘이 그래답다고 생각하던 그때, 그래가 도착했다. 차로 다가와 똑똑- 조수석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마저 사랑스럽다.

 

강대리님.”

 

그래씨, 왔네요. 갈까요?”

 

오래 기다리셨죠?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야근하는 애인을 기다리는 것도 연애의 즐거움 아니겠어요.”

 

 애인, 그리고 연애라는 말에 그래의 목이 붉게 달아올랐다. 해준이 작게 웃었다. 그래가 마주 웃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도, 이제 연인이 된 해준과 가까이 하는 시간은 마냥 좋았다.

 

가만 보면 그래씨는 부끄러움이 많은 것 같아요.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래요?”

 

 당황스러웠는지 그래가 목에 이어 얼굴까지 붉혔다.

 

. 처음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잖아요, 혹시 기억나요?”

 

 그럼요. 그래가 대답했다.

 

그 때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그래씨 얼굴이 딱 이 색이었어요.”

 

…….”

 

예쁩니다.”

 

 해준이 말했다.

 

그때도 예뻤어요.”

 

 더 빨개질 수 없을 줄 알았던 그래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연애 처음입니까? 내가 첫사랑?”

 

  해준이 웃으며 가볍게 물었다. 그 질문에 그래는 아까 동기들과 직원 휴게실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했다.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는데. 영이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에 동조하던 석율과 백기의 말도 떠올렸다.

 

, 아뇨 첫사랑 아닙니다.”

 

  그래는 놀라서 첫사랑이 아니라며 부정의 문장을 내놓았다.

 

그래요?”

 

.”

 

  해준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데려다주겠다고 했죠? 그래씨 집이 어딥니까?”

 

  그래가 주소를 불러주자 해준은 운전을 시작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웃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뚱한 얼굴이었다. 그래는 해준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그래의 집에 가까워졌을 때 즈음, 해준이 물었다.

 

그래씨. 그래씨 첫사랑은 그래씨 집에 가본 적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래의 눈이 동그래졌다.

 

?”

 

아닙니다.”

 

  해준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제 질문을 취소했다. 그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준이 왜 그러는지 알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해준은 일을 하다 말고 그래의 첫사랑에 대해서 고민했다. 괜찮은 척 했지만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의 반응을 보면 분명 연애는 처음인 것 같은데, 첫사랑이 아니란다. 그 때, 동식이 해준의 눈에 띄었다.

 

김대리.”

 

해준이 동식을 불렀다.

 

? ?”

 

너희 팀에 그래씨 있잖아.”

 

. 장그래가 왜?”

 

  동식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둘이 언제 친해져서 강해준이 저에게 장그래의 얘기를 꺼내며, ‘장그래씨도 아닌 그래씨로 부른단 말인가.

 

그래씨 첫사.”

 

장그래 첫사랑? 나도 몰라.”

 

  궁금한 얼굴이던 동식이 얼굴을 구기고 대답했다. 남의 팀 신입사원의 첫사랑을 물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줄 알았건만 동식은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담담하게 답했을 뿐 아니라 첫사랑이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대답을 내놓았다. 해준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며 동식이 덧붙였다.

 

장그래 무슨 날이야? 한석율도 그렇고 장백기씨도, 안영이씨도, 너도. 아니 왜 자꾸 장그래 첫사랑을 물어?”

 

한석율씨?”

 

. 장백기씨랑 안영이씨도.”

 

  해준은 석율이 그래의 첫사랑에 대해 물었다는 것이 신경쓰이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래는 석율과 붙어있는 시간이 유독 많았다. 같은 입사 동기인 영이나 백기보다 유난히 같이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입사 PT를 같이 치렀으니 친하게 지낼 수 있다지만 제 연인이 다른 남자와 가까이 지내는 것이 곱게 보일 리 없는 것이다. 해준은 더 묻고 싶었지만 동식이 더 이상 묻지 않으니 저도 동식에게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기로 했다.

 

 

 

 

백기씨, 점심 먹자. 영이씨는 금방 올 거야.”

 

  그 날 점심시간, 석율이 그래의 어깨를 붙잡아 질질 끌고 백기가 있는 철강팀에 나타났다. 해준은 반가운 얼굴에 웃어주고 싶었지만 옆에 있는 그래의 동기들 때문에 가벼운 눈인사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 눈짓을 받아낸 그래가 슬며시 웃었다.

 

, 한석율씨, 장그래씨. 잠깐만요.”

 

  백기가 하던 서류를 마무리 하는 동안 석율은 요즘 계속 꺼내던 화제를 다시 언급했다.

 

장그래 첫사랑이 누군데 그래, ? 안 알려줄 거야?”

 

. 안 알려줄 겁니다.”

 

왜애, 지금 만나고 있는 첫사랑이 누구라고? ?”

 

한석율씨. 제가 지금 누굴 만나든!”

 

  그 때, 해준과 그래의 눈이 마주쳤다. 그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준이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들키고 만 것이다.

 

, 그래야. 누굴 만나든?”

 

됐습니다.”

 

  석율이 물어왔지만 그래는 뚱하게 대답하고는 막 도착한 영이와 함께 앞장서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야근은 신입사원의 특권이라 했던가, 해준은 오늘도 어김없이 차에서 그래를 기다렸다. 한 시간 뒤 나타난 그래가 조수석에 탔다. 해준은 어두웠지만 붉어진 얼굴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장그래씨.”

 

  해준이 조용히 불렀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어도 애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일일 것이다. 달콤했다. 진부한 표현일는지 몰라도 정말 그랬다. 손가락이든 입술이든 그래의 몸 어딘가 한 구석을 녹일 듯한 달콤한 목소리였다. 손끝에서 시작된 떨림은 머리칼 한 올 한 올을 간지럽게 했다. 그래는 안절부절 못하던 것도 잊고 얼굴을 붉혔다.

 

, 대리님.”

 

그래씨 첫사랑이 누구라고요?”

 

  해준의 질문에 그래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대리님아시잖아요.”

 

그래가 밉지 않게 투정을 부렸다.

 

모르겠는데, 말해줘요.”

 

해준이 짓궂게 말했다.

 

대리님이요.”

 

  그래가 대답하고는 해준의 품에 기대듯이 안겼다. 그래의 등에 해준이 손을 얹고 토닥였다. 얼굴을 붉히며 제가 첫사랑이라 말해오는 연인의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해준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며 낮게 웃었다.

 

  안겨오는 그래가 귀여워도 의문은 해결해야 했다. 그래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해준은 제 품에 얼굴을 묻은 그래를 보다가 양 볼을 감싸고 고개를 들게 했다. 제 마음을 전하던 그 때 그 날처럼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 원래의 색을 띠는가 싶던 그래의 얼굴이 다시 붉게 물었다.

 

왜 숨겼습니까?”

 

그건 왜요?”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래씨가 왜 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니까. 말해줘요.”

 

그게, 안영이씨가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고 해서요.”

 

, 그래서요?”

 

물론 제가 첫사랑인 걸 숨긴다고 해서 정말 아닌 게 되지는 않지만요.”

 

 그래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쿠쿡, 해준이 웃었다.

 

그래서, 나랑 헤어지게 될까봐 그랬다는 말입니까?”

 

  귀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 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준이 그래를 다시 품에 넣었다. 마른 듯 제법 강한 어깨가 두 팔에 뿌듯이 찼다. 보듬어 안는 해준의 손길을 받으며 그래의 가슴에, 웃음 가득한 그 마음에 꽃 한 송이가 피었다. 분홍빛의 예쁜 첫사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