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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첫 수(-手) (W.무화)

bgm. Jim Chappell - From My Heart 

 

 

 

 

-手


* 미생 강해준 x 장그래

* 궁합도 안 보는 나이, 네 살 차이 (@1983x1987) 합작 : 1제. 






빈 틈 없는 흑돌. 그의 견고하고 단단한 바둑판 위로 첫 수(-手)가 놓였다.


“ 좋은 아침이에요. 장그래 씨. ”


도로를 울리는 비명과도 같은 경적소리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출근하는 사람들. 그 틈 속에 뒤 섞인 두 남자가 짧은 목례로 인사를 나눴다. 금세, 작은 네모칸이 물 밀려오듯 빽빽하게 채워지며 공간 사이사이의 틈조차도 결코 내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채 한 층 한 층 위를 향해 올라가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서로에게 닿고 있었다. 그리고 원치 않아도 스치는 손등 역시도. 부드럽게 감싸이는 감촉에 그는 애써 민망함을 감추려 바닥으로 시선을 옮긴 채 바르작 주먹을 꼭 쥐었다.


이건, 조금 위험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15층에 도착하는 순간 언제나 현실을 자각한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끼운 채 코앞 닿는 자리로 향하는 남자와 화장실이 맞붙은 가장 구석지고도 구석진 그곳으로 향하는 한낱 계약직 사원. 잡념이란게 붙어 질척거리는 머릿속에 또다시 버텨야만 하는 일주일을 알리는 듯한 날카로운 파쇄기 소리가 무심하게 귓 속을 파고들었다. 마우스 달깍이는 소리와 회색빛 경치 속에서 유일하게 경쾌한 키보드 소리. 그리고 전화벨 소리와 그 너머로 들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

그 모든 잡념을 날릴 만한 바쁜 시간을 쉴 새 없이 달리며 모든 직장인들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점심시간을 뛰어 넘고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한가한 탕비실 속으로 도주하면 그곳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강해준.


“ 커피 마시러 온 거 아닙니까? ”

“ 아, 네 ……. ”


건네오는 종이컵. 독약 같은 거 없습니다. 양손을 보이며 입가에 커피를 머금은 채 자리를 벗어나는 해준에 그래는 망연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이런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편안하게 손안으로 들어찬 종이컵을 뜨끈하게 데우는 커피의 온도가 적당했다. 왜 제게 커피를 건네는 것인가. 눈꺼풀이 밀려 내려오는 피곤함에 정신없이 타낸 커피를 식히지도 않은 채 들이키는 덕에 번번이 데이는 입속을 그는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게 많은 머릿속을 어지러이 괴롭히는 수 많은 상상들 속에서 그래는 그만 실소했다. 아주 실 없는 생각이었다.

바래서는 안 되는, 바랠 수도 없는 기대와 욕심.


“ 장그래, 이거 철강 팀에 전해주고 와. ”

다정스러운 호통. 어디 한구석이 온갖 잡념의 실타래로 이루어진 것을 알고있는 냥 깨우는 목소리에 장그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서류를 품 속에 받아들었다. 아주, 그냥 어? 휴일에 뭐 하다 왔어? 정신 팔지 마! 또 혼나는구나 싶어 사방에서 꽂히는 안쓰러운 시선에도 그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들은 알지 못 했다. 유난히 남다르게 표현하는 기분 좋은 걱정과 위로를.


“ 대리님. 장백기씨는 …… ”

“ 아, 고마워요. 장백기씨는 지금 외근 나가서, 돌아오면 전해주겠습니다. ”

“ 네, 부탁드립니다. 강대리님. ”


아, 잠깐 장그래 씨. 손바닥 위로 놓인 사탕.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 그 언젠가 보았던 선한 웃음을 만면 가득히 머금은 해준이 수고해요.라는 인사를 짧게 읊조리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장그래는 문득 생각했다. 그의 지나친 다정함에 대해서. 그리고 바래서는, 바랠 수도 없는 욕심에 대해서. 그리고 손바닥 위에 자리한 동그란 사탕이 꼭 둥글게 몸을 말아 웅크린 저와 같다고. 그러니까, 그러므로 그렇기에, 그래서…. 더 이상 선을 넘어서는 안되는 것들에 대해서.

장그래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선은 어디까지 그어져 있는 것 인지. 욕심도 허락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이건 허락받을 수 있는 욕심인지.


“ 감사합니다. ”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허락받을 수 없는 욕심이다.


장그래는 견고하고도 단단한 집을 유연하게 침범하는 흑 돌에 대해 그만 고개를 내젓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 * *



 

장그래는 그에게 어울리는 꼭 맞는 수식을 찾지 못 했다. 그 무엇을 가져다 붙여도, 그 어떤 멋들어진 표현을 입혀도 그에게 알맞은 옷은 없었다. 그에게 표현할 만한 단어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 세상 가장 단단하고 견고한 그 어떤 곧은 심지의 단어들을 가져다 붙여놔도 어울리는 인물이며 위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에게 꼭 맞는 수식을 찾지 못한 이유는 ….


꾸며진 게 아닌 실로 진실 된 그의 마음을 정형화된 단어에 수식하고 나면, 그게 나를 무너뜨릴 것만 같아서.


“ 장그래 씨, 잠깐 얘기 좀 해요. ”


빠르게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집요하게 뒤따라오는 발 소리에 그래는 야외 휴게실로 몸을 틀었다. 결국, 부딪혀야 한다면 지금뿐이다. 선수(先手)를 쳐야 한다. 그가 어떤 수를 쓰기 전에 먼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만 했다.


“ 강대리님, 저…… ”

“ 혹시 내가 장 그래 씨 한테 실수한 게 있습니까? ”


빠져나갈 틈 없이 강하게 붙잡은 악력이 손목에 묶이자 입을 열다 말곤 소스라치게 놀란 그래의 모습에 해준 또한 놀란 듯 두 사람은 그대로 제자리에 두 다리를 묶인 채 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이 둘에게 닿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마디씩 입을 열어 말을 걸어도, 그러한 소음 속에서도 꿈쩍 않던 둘의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 꺼풀, 두 꺼풀 허물을 벗어내리고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눈은 사람의 감정과 마음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 아니면, 부담스러웠나요. ”


그제야 푹 숙이던 고개를 든 그래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해준이 제 모든 속을 남김없이 비춰 내보이고 있었다. 더 이상 그에게는 내어주거나 보여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제 오만이자 자만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장그래가 차마 보지 못 했던 그 모든 것들. 제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치부까지 싹싹 끌어내 보이는 해준의 눈물 시린 다정함에 그래는 그만 눈물을 터뜨릴 뻔했다.


“ 뭔가를 바라고 한 행동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눈치챌 거라고 생각도 못했고 …”


그 집을 침범 하려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장그래에게는 그렇게 들려왔다.


“ 장그래 씨 대답을 강요하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


분명 꽁꽁 묶여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풀어진 손목에 그는 더 이상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준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참을 수 없이 손목이 시큰거렸다. 콧등도 시큰거리고 눈가도 시큰거리고 자꾸만 매 마르는 입속으로 고여 드는 침도 목구멍을 타고 흘러 시큼했다.


‘ 스승님, 왜 첫 수(-手)는 항상 우상귀로 두어야만 하는 건가요. ’

‘ 그건 상대방에 대한 예우 같은 거야. 이제 시작 할테니 서로 인사를 나누자는 손의 대화지. 이건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주아주 오래전에 정해져 내려 온 거야. ’


장그래가 바라본 그의 첫 수는 우상귀였다. 그리고 그것이 장그래는 참을 수 없이 서러웠다.

나의 대한 예우. 먼저 성큼성큼 다가오기보다는 이제 시작 할테니 가볍게 인사 먼저 하자는 그의 뜻을, 말하고 있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 것 같아서.





* * *



해준은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무도 없는 15층. 조용한 적막 속에 감싸인 채 그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제가 갈피를 못 잡고 방황 때면 어디선가 나타나 방향을 제시해 주면서도 그럼에도 바라는 것 하나 없이 고맙다는 인사 하나에 진심으로 기뻐할 줄 아는, 제가 아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소박한 사람.


‘ 강대리님. ’


마음을 꽁꽁 숨긴 채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어디부터, 어떻게 잘 못 된 것인지. 윤기 없이 까슬까슬 거리는 맨 얼굴을 쓸어내린 해준이 별안간 복잡스러운 생각을 접고 노트북과 서류를 가방 속에 차곡차곡 담아냈다. 제가 이곳에 앉아 그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생각한다 한들 해결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의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지금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은 그저 그것뿐 이었다. 장그래 그리고 장그래.


“ …삼 팀? ”


철강 팀 위로 자리한 조명 스위치를 내리다 말고 환하게 빛나는 구석진 그곳에 해준은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발걸음을 옮겼다. 흐릿하기만 했던 형체들이 가까워질수록 하나 둘 눈 안에 자리하며 점점 선명하게 들어차고 있었다. 켜졌다 저절로 꺼지는 컴퓨터의 화면과 부재중을 알리는 반짝이는 핸드폰. 그리고 두 팔에 얼굴을 가득 파묻곤 책상 위에 엎어진 채로 아이처럼 곤히 잠든 모습의 장그래가.

“ 장그래 씨, 그래 씨. ”


두어 번 어깨를 강하게 흔드는 ​힘에 눈을 반쯤 뜨다 말곤 고개를 먼저 든 그가 이내 코 닿을 거리에 바라보고 있는 해준의 모습에 덜컹 거리는 소음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고 그와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져 나가는 서류 뭉치와 핸드폰 그리고 가방에, 그 상황을 인지하지 조차 못 해 여전히 해준에게만 시선을 둔 그래의 모습을 보곤 먼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 담아 테이블 위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해준이 이내 그래의 가방을 챙기며 의자에 걸린 외투를 그의 손에 건넸다. 장그래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자충수(自充手).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명백한 실수였다.


“ 집이 어딥니까. ”

“ 버스…버스 타고 가면 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리님. ”

“ 버스도 끊겼을 거고 지하철도 끊겼을 시간입니다. 그리고 찜질방이 오늘 쉬는 날 인건 알고 있습니까? ”


억지 부리지 말고 내 차 타고 가요. 안 잡아먹습니다. 강하게 말하면서도 결국 끝에는 다정한 농담 식 위로를 건네는 그가 먼저 발걸음을 떼며 15층을 나섰다. 그 뒤를 따라가는 그래 역시도 다급히 스위치를 내리며 함께 엘리베이터로 몸을 실었다. 15층, 14층, 13층…. 끝없이 나락으로만 떨어질 것 같던 기계의 소음 속에서 그래는 집을 지키는 바둑알의 수비를 수 없이 생각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 로비를 벗어나고 어른거리는 도로의 영롱한 불빛들 사이를 빠르게 스치며 지나가기까지 그가 낸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집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던 수비벽은 허물어진지 오래라는 것. 그것도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아무런 대화가 오고 가지 않는 공간 속에서 장그래는 새삼스럽게도 침묵이 불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먼저 입을 여는 법 없이 그는 이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그것은 도착지에 도달할 때까지 해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리님. ”

“ 아닙니다. 조심히 들어가요. ”

그리고 죄송합니다. ”


거듭되는 그의 사과 말에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을 한 해준이 손가락을 얽어가며 꼼지락거리는 그래를 한참 바라보다 입을열었다. 그렇게 데려다 준게 미안하면 교통비는 이걸로 퉁치죠. 강하게 팔을 잡아당기는 힘에 졸지에 해준의 품 안으로 갇힌 그래가 어정쩡하게 펼쳐진 팔과 휘둥그레 떠진 눈동자의 갈피를 못 잡고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 대답을, 마음을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래도 지금보다 더 멀리 밀어내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지금은 그거면 됩니다. ”


제게 다가왔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둘씩 상처를 입고 떠났다. 마음을 보이면 도리어 그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마음을 숨기면 도리어 그 숨김에 대한 상처를 입었다. 처음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한 그때, 욕심도 허락받아야 하는 세상이라 믿음을 굳힌 제게 상처 입은 사람들은 가시가 박힌 채 등을 돌리며 떠나갔었다. 그렇기에 그도 분명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단정 지어버린 그 모든 날 속에서 아무런 상처 없이 바둑판 위에 홀로 서 있는 그를 나는 이제야 발견했다. 바닥에 선명하게 네 땅이다, 내 땅이다 그어져 있었던 선은 희미했다. 그가, 해준이 쉼 없이 바닥의 선을 지워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들어가요. 내일 봅시다. ”

소중한 것을 놓치고 싶지 않은 냥 꼭 쥐었던 손목을 놓았던 그때처럼, 품 안의 온기가 아쉬운 듯 몇 번이고 망설이다 먼저 몸을 떼어낸 해준이 어색한 미소를 만면에 띄어냈다. 장그래는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어깨를 두 어번 토닥이며 부담을 덜어주려는 그를, 다시금 차 시동을 걸고 내려져 있던 창문을 올리며 천천히 동네를 벗어나는 그를, 끝내 자신에게만은 해사하게 웃어주던 그를.


그런 그가 이미 바둑판 위에 가장 중요한 집(大門) 으로 자리해 있었기 때문에.

견고하고 단단하게 이루어져 수비가 가득한 장그래의 바둑판 속으로 들어온,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견고하고 단단하게 이루어진 강해준. 우리에게 자리한 것은 결국 쌍패빅(雙霸-). 그럼에도 이것은 완벽한 강해준의 승(勝) 이었다. 이제 바둑판으로 이루어진 장그래의 세상에 자리한 것은 강해준이란 바둑 돌 뿐이었다.


“ 좋은 아침이에요. 장그래 씨. ”

“ 네, 좋은 아침입니다. 강대리님. ”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조심스레 첫 수(-手)를 두기 시작 한 두 사람이 있었다.

 








 

 







 




* 첫수(-手) :바둑이나 장기 따위에서, 맨 처음에 두는 수.

* 자충수(自充手) : 스스로 행한 행동이 결국에 가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우상귀 : 바둑을 둘때 바둑판을 자신의 시점에서 오른쪽 위에 해당하는 곳이다.

* 쌍패빅(雙霸-) : 바둑에서, 쌍패로 비기게 된 형세. 흑백 어느 쪽도 서로 잡을 수 없다.

* 집,대문(大門) : 바둑에서, 넓게 벌이어서 상대방(相對方) 돌을 가두어 잡는 장문(藏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