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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Elevating Relationship (W.빙다리 핫바지)










Elevating Relationship

 

강해준 X 장그래

 


w. 빙다리 핫바지

 

 

 

 


사실 해준은 그렇게 고민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하나씩 끝마친 뒤 지워나가면 결국 끝에 남는 것은 소소한 뿌듯함뿐이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지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고민이라니, 그에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요사이 업무에 코가 빠져있는 중간중간에도 그를 고민 많은 남자로 만드는 것은 진전 없는 그의 연애사업 때문이었다. 뻐근한 목을 뒤로 젖히자 이런 해준의 고민을 약 올리기라도 하듯 마침 종종 걸음으로 그의 연인이 서류에 코가 빠진 채로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한 번만 이쪽을 쳐다봐줬으면 하는, 또 그대로 제게 달려와 안겼으면 하는 마른 몸은 저만큼이나 일밖에 모르는 탓에 금세 뒤돌아 자동문을 빠져나갔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에 해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에 애꿎은 그의 후임만이 눈치를 볼 뿐이었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강대리.”

, 김대리.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냐고. 철강팀에 별 문제는 없던데.”

내가 한숨 쉬었어?”


그럼 들숨이게? 뭐야, 어디 아파?

 




해준의 한숨은 탕비실에 도착해서도 멈추지 않고 자동응답기마냥 절로 흘러나왔다. 정신이 하나 빠진 듯 무의식적으로 젓는 커피는 이미 식어빠진 채로 해준의 손에 들려있었고 어느 새 다가와 그를 마주보는 동식의 얼굴이 더러 얼이 빠졌다. 방금 전 철강팀에서 인계 받은 서류는 언제나처럼 완벽 그 자체였었건만 제 동기 꼴은 왜 이 모양인지 전혀 감을 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눈 앞에서 여러 번 손바닥을 흔들어봐도 귀찮은 기색 없이 멀뚱히 자신의 신체 어딘가를 바라보는 해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애먼 곳만 바라보고 있자 동식의 얼굴은 더욱 근심으로 가득해져만 갔다.

 




진짜 무슨 일 있어? 오랜만에 향수 냄새 좀 맡아볼래?”

김대리.”


?”

말뿐인 관계는 어떻게 진전시켜야 하는 걸까.”


무슨 소리야, 그게.”

 




말로만 특별하다 정의한 관계가 다른 것들과 다를 게 없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

해준의 멍한 중얼거림에 잔뜩 몸을 숙이고 귀를 기울이던 동식은 해준을 따라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에게 이어받은 듯 한숨을 포옥 내쉬어왔다. 그 숨소리에 문제를 던져놓고 다른 세계에 빠져있던 해준의 초점이 돌아와 그를 향했다. 마주봐오는 눈초리는 어째선지 탓하는 모양새였다. 의문스런 표정은 이제 해준의 얼굴에 그려진 채 자신의 동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급하긴 급했나봐, 강대리. 그런 걸로 나한테 조언을 구하고. 지금 나 놀리지.”

뭐가.


모태솔로한테 지금 연애 상담하는 거 아냐. 강대리 요새 연애해? 뭐야, 누구랑?”

………

 




해준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동식에게 차마 자신의 연애 상대가 지금도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동그란 네 후임이라 말할 수 없는 것과 더불어, 과연 이 관계가 연애라는 말로 엮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연인이라면 연인이었다. 연애하자는 말로 시작한 건 확실했으니까. 물론 둘이 있어도 여전히 영업 3팀의 장그래 사원과 철강팀의 강대리 같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해준은 이 애매한 관계가 지속되는 것에 목이 타 하루에도 여러 번 이렇게 넋을 놓기 일쑤였다. 지금도 고민으로 활활 타올라 쩍쩍 갈라진 목안으로 넘긴 커피는 다 식어빠져 설탕맛과 다름 없었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해준은 쩝, 입맛을 다시고 입을 다문 채 평소와 다르게 다시 멍하게 눈을 흐렸다. 동식은 다시금 평소에는 상상도 못했던 해준의 흐리멍덩해진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벽창호 같은 철강의 강대리를 흔든 것이 무엇이든 큰일임에 틀림 없어 동식은 혀를 쯧쯧 차다 새 커피를 타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손바닥 전체가 뜨끈해지는 커피였다.

 




한다고 해도 사건이고 안 한다고 해도 사건이네. 우리들 중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철강팀 일벌레 혼을 쏙 빼놓은 것만으로도 대사건이지.”

………


있잖아, 내가 다 몰라도 그건 알아.”

어떤 걸?”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거.

동식의 말에 해준은 제 손에 새로 들려있는 컵을 빤히 내려다봤다. 아까와 같은 갈색 가득한 커피 색임에도 아까의 달디 단 설탕맛이 아닌 고소한 커피향이 솔솔 풍겨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힘 내, 적어도 나보단 강대리가 더 잘하겠지. 동식이 툭 해준의 팔을 치며 곁을 지나치자 잔잔하기만 했던 커피의 표면에서는 잔물결이 일었다. 입안으로 다시 한 모금. 분명히 같은 커피였음에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향이 가득 텁텁하기만 했던 해준의 입안에 일었고 아직 다 마시지 못한 커피에선 아직도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고 있었다.

 





*  *  *

 


 

 




변화라는 말은 해준과 그렇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었다. 그가 일하고 있는 철강팀이란 제 연인이 몸을 담고 있는 영업 3팀처럼 급격히 변하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닌, 꾸준하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그보다 대단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그룹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과 같은 스피드로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 성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 그것이야말로 해준과 찰떡궁합인 정의였고 해준 또한 그 점이 자신에게 있어 유일한 장점이라 판단했었다. 자신이 제 어린 연인과의 관계에 고민하기 전, 딱 그전까지 말이다.

 

그렇다고 해준이 애매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작과 끝이 명료한 것을 좋아하는 그는 딱 한 달 전, 언제나처럼 야근을 마치고 다른 누구보다 자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던 그래에게 누구보다 무드 없고 명료한 시작을 고했었다.

 




장그래씨.’

, 대리님.’


나랑 연애할래요?’

 




멀게만 보였던 그래의 대답은 1층 로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다시 문이 닫힌 채 그 작은 공간에서 나지막한 두 숨소리만 귓가에 맴돌게 될 쯤에야 흘러나왔다. . 영겁 같았던 시간을 뚫고 저만큼이나 신중한 그래에게서 긍정의 대답이 내려졌다는 것만으로도 그때 당시 해준에게는 꽤 진전이었다. 그래, 시작은 명료했으니 딱 이렇게만. 이 속도로 다른 연인들이 하는 것처럼 하나, 둘 해나간다면 부러울 바 없는 연애가 될 것이라 여겼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해준이나 그래가 서두르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은 이 회사의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해준 또한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한 달이 지나자 누구보다 성급하고 애가 타는 건 우습게도 또한 해준 스스로였다. 함께 밥을 먹어도, 단 둘이서 오붓이 영화를 봐도 어째선지 그저 원인터의 강 대리와 장 사원인 것만 같았다. 이 무던하고 특별하지 못한 관계엔 변화라는 인공호흡이 절실히 필요했다. 연인이라는 팻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그런 사이로의 발전이 필요했다. 그 변화와 발전이라는 것이 여전히 해준에게는 철강팀의 업무보다 어려워 큰 문제였지만 말이다. 김대리와 마주치고 와 도로 자리에 앉은 해준은 고민에 다시 목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그래서 어떻게? 아직도 가장 큰 고민이 해결이 안 된 채 째깍째깍 시간은 흘러 퇴근시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대리 그러다 병 난다? 사람이 가끔은 막, ? 일탈도 좀 하고. 강대리는 1 365일 너무 계획적이야.”

그래, 강대리. 그러다 연애도 업무 처리하는 것마냥 하는 거 아닌가 몰라.”

 




퇴근을 하며 지나가던 자원팀 과장과 대리의 놀리듯 흘리는 말에 해준은 야근을 준비하며 입꼬리를 올려 멋쩍게 웃어 보였다. 생각보다 자신이 그렇게 꽤 꽉 막혀 보이는 사람이었나 싶기도 한 마음에 더러 제 연인 생각이 났다. 스스로를 무드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자신을 옆에 설 수 있도록 허락해준 그래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자나깨나 연인 생각뿐인 해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자원팀 두 사람의 뒤로 요술처럼 익숙하고 동그란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루 종일 해준을 고민에 빠뜨린 장본인은 언제나처럼 수수하고 달달해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어 보인 채 제게만 보이도록 꾸벅 인사를 하고는 유유히 유리문 너머로 사라졌다. 기다려줬으면 하는데, 혹은 가까이 와서 반나절 내내 보기 힘들었던 얼굴 보여줬으면 하는데. 멀어지는 그래의 뒷모습을 보며 제게 하는 인사가 다른 누구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특별한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다시금 해준에게 몽글몽글 피어 올랐다.

 

사람들이 꽤 빠져나가 서늘하기까지 한 철강팀의 파티션 안에서 해준은 들고 있던 펜을 던지듯 내려두고 책상 위에 놓여 자신의 집중을 내내 빼앗았던 제 휴대폰을 들었다. 저장된 이름들 모두가 성을 꼭꼭 붙여 딱딱하기 그지 없는 목록 속에서도 신기하게 단연코 시선을 빼앗아가는 장그래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꾹 눌렀다. 저장을 하고서는 잘 손대지 않아 어색한 편집 버튼까지 누르고는 보다 저에게 있어 누구보다 특별하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해준은 답지 않게 그래의 이름 앞 글자를 톡 떼고 새로운 글자를 뒤에 툭 붙였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모두 3글자임에도, 딱히 변한 것은 없음에도 낯부끄럽게 하는 그 이름을 누르고는 꾹꾹 자판을 놀렸다. 애가 타 우스운 모양새였다.

 




[내일 봐요, 그래씨]

 




별 거 없는 문자였다. 언제든 이야기할 수 있는 문자에 새로 달린 이름에게 날아온 답장은 꼭 저와 같이 일상적이고 타인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대답이었지만 해준의 심장을 쿵쾅 뛰게 했다.

 




[. 푹 쉬세요, 대리님]

-그래야

 




 고민을 뒤로 하고 스르륵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웃음을 얼굴에 띈 채 해준은 제 연인의 짧은 문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야. 아마 이렇게 소리 내어 부르기까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아직은 그래에게 이 이름을 보여주긴 낯부끄럽겠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보다 일보 전진한 관계를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 같은 건 여전히 잘 모르겠으나 지금 해준이 딱 한 가지 확실히 알고 있는 건, 이렇게 평소의 리듬을 놓치고 성급해질 정도로 자신은 제 어린 연인을 많이 애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  *

 



 

 



아침부터 외근이었던 터라 해준이 회사 로비로 들어온 건 마침 끝마쳐가는 점심 무렵이었다. 조금 쉬다 올 법도 한데도 해준은 휴식을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뚜벅뚜벅 회사 안으로 걸어왔다. 계획에 어긋남이 없는 유려한 걸음걸이에 엘리베이터 앞에 선 사람들이 하나 같이 다정한 인사를 건네왔다. 인사를 받으면서도 그 무리 속에서 해준이 유일하게 눈을 마주한 사람은 오늘도 말간 얼굴의 제 연인, 그래였다. 꾸벅,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인사하는 몸 옆으로 스며들어 그의 어깨를 잡고는 티가 나지 않게 상체를 일으켜주었다. 자신에게만큼은 편했으면 하는 해준의 배려를 알아차렸는지 그래의 입꼬리에도 소복한 웃음이 쌓였다.

 

뎅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 꽤 많은 인원에 두 사람은 꽤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 어깨를 딱 붙이고 선 안쪽에서는 점점 후텁지근하게 온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단 둘이었으면 시덥잖은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해준의 손끝에 그 온도를 꼭 담은 다른 손끝이 닿아왔다. 살짝 스친 손에도 다시 오므리는 손가락이 아쉬워 해준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보면서도 솟는 긴장에 작게 입술을 핥았다. 부담스러워하면 어쩌지. 놀라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래도. 수많은 걱정들이 해준의 머리를 스치다 이내 생각난 동식의 짧은 말 한 마디로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그와 동시에 해준의 손은 그래의 손바닥과 겹쳐 자신보다 작고 마른 손을 살포시 그러쥐었다.

 




………

………

 




말이 없는 두 사람의 손바닥 사이로 송글송글 땀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해준은 결심이라도 한 듯 이내 그래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고는 아까보다 꼬옥 손을 쥐어왔다. 결국 해준과 같이 엘리베이터 숫자만 바라보던 그래의 눈동자가 부끄러움을 가득 안고 도르륵 바닥으로 굴렀다. 손을 잡기 전까지 해준을 망설이게 했던 걱정들은 그 행동 하나에 말끔하게 지워져 두 사람의 손을 더욱 꽉 들어맞게 했다.

 




강대리, 이번 업무 끝나면 술 한 잔 해.”

, 끝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린 사람들을 뒤로 하고 닫힌 엘리베이터 안에는 해준과 그래 단 둘뿐이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도로 그래의 손바닥을 감아오는 해준의 손은 여전히 긴장에 젖어 촉촉했다. 하고 싶은 말이 꽤 많았었는데 손에 닿아오는 체온 때문인지 해준의 입이 열리는 건 쉽지 않았다.

 




밥 맛있게 먹었습니까?”

. 대리님은 식사하셨습니까?


어쩌다 보니 미팅한 팀하고 같이 먹었네요.”

 




어제 보냈던 문자처럼 일상적이고 어찌 보면 시시한 대화였다. 하지만 그 몇 마디 오간 것에도 해준의 심장이 쿵쿵 평소보다는 배로 빠르게 뛰어만 갔다. 아직도 꼭 잡고 있는 손으로 이 울림이 건너갈까 답지 않게 노심초사하는 마음 또한 주인의 뜻과는 달리 부풀어나기 바빴다.

별 대화 없이 15층에 멈춘 엘리베이터는 두 사람 앞으로 문을 열어주었고 그 문 앞에는 두 사람이 내릴 길을 내어주는 듯 아무도 없이 훵한 벽만이 보였다. 해준의 뒤로 따라 내리려는 듯 잠깐 망설이는 그래의 구두 끝을 보다 해준은 그대로 몸을 돌려 그래를 마주봤다. 그래의 눈은 질문으로 가득 차 해준의 얼굴에 닿았고 열렸던 엘리베이터 문은 도로 꼬옥 두 사람만을 안쪽에 남겨둔 채 닫혔다. 그와 동시에 해준의 손이 다시 퍼즐조각처럼 그래의 손에 감겨 꼬옥 깍지를 끼어왔다.

 




단 둘이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해준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벙긋거리는 그래의 하얀 얼굴이 미묘하게 달아오르다 이내 거짓말처럼 빨갛게 귀를 달궜다. 더 우스운 건 그런 그래의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담는 해준의 얼굴도 분홍빛으로 상기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침묵뿐인 엘리베이터 안은 단 둘이었음에도 후끈하게 두 체온을 달아오르게 했고 그 모습은 마치 그들의 관계가 첫 걸음을 뗐을 때의 모습과도 같았다. 흐르는 말은 없었지만 포근한 분위기가 두근두근 다시 새 연애를 시작하는 듯 손끝을 간지럽혔다. 결국 두 손바닥이 꽤 눅눅해져 미끌거릴 때까지 멈춰있던 엘리베이터는 한참의 시간 후에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여 바로 위층인 16층에 닿았고, 문이 열리기 전에 어색하게 젖은 손을 뒤로 감추던 두 사람 앞을 기다린 건 다름 아닌 의문을 가득 띈 석율의 얼굴이었다.

 



 

 



석율의 반강제 어깨동무에 걸린 채로 자신의 팀으로 돌아갔던 그래와 다시 마주한 건 퇴근을 코앞에 둔 시간이었다. 뒷정리로 바쁜 사람들 틈 속에서 해준은 너무도 쉽게 그래를 찾을 수 있었다. 눈앞이 서류더미에 가려 자신의 발 끝만 보고 가기 바쁜 그래의 옆모습을 보고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 짐을 제 것마냥 덜어 든 건, 그래와 손을 잡은 후부터 하루 종일 간질거렸던 제 손바닥 탓이니 하였다. 그러나저러나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서 짐을 든 채 그래의 옆에 나란히 선 해준은 너무나 불쑥 자신이 튀어나온 건 아니었는지 새삼 후회 중이었다. 대리님,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라고 했던 그래의 말을 들었어야 했던 건 아닐까. 불쑥 손 한 번 오래 잡은 것으로 마음만 앞서 너무 서두르는 것은 아닌지 다시 걱정이 앞섰지만,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자신을 올려보며 감사합니다. 하는 그래의 보드라운 목소리에 해준은 온몸이 사르르 녹아 내리는 듯 했다.

 




오늘 일찍 퇴근합니까?”

낮에 마무리 못 지은 서류 하나가 있어서 야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오늘 야근인데

?


같이 퇴근할까요?”

 




짐을 내려놓고 다시 15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눈 이야기는 언제나처럼 일상적이고 특별할 것 없었지만 뜸을 들이다 뱉은 해준의 마지막 말은 또다시 연애의 시작점으로 두 사람을 돌려놓은 듯 했다. 그리고 그 때처럼 그래의 대답은 15층의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힌 다음에서야 붉어진 귀와 함께 긍정을 품고 흘러나왔다. 해준은 먼저 돌아가는 그래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아직도 아까 손깍지를 끼느라 맺힌 땀이 송글거리는 듯 한제 손을 쥐었다 폈다. 잔뜩 달아오른 귀를 가린 그래의 손끝마저 붉어 보는 해준의 마음도 또한 더러 쿵쿵거렸다.

 




[정리 다 됐어요?]

[, 대리님은요?]


[나도 다 됐어요. 이쪽으로 와요.]

 




오목조목한 이모티콘이 없어도 간질거리는 것에 손가락은 자꾸 제 어린 연인의 버릇마냥 귀 끝에서 맴돌았다. 15층의 불이 꺼지고 저벅저벅 제게로 다가오는 걸음걸이는 듣기만 하여도 동그란 머리를 떠올리게 해 짐을 챙기는 해준의 손길이 바빠졌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저를 보고 잠깐 멈칫 했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몸에 해준도 잠깐 멈춰 섰다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15층으로 올라오면서 커져가는 숫자가 무색하리만치 두 사람의 손은 다시 만난 엘리베이터 앞에서 틈새 없이 꽉 잡혀있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자리잡은 손깍지는 열린 문 안으로 오르면서 풀렸지만 문이 닫힘과 동시에 도로 사이 좋게 엉켜 들어갔다.

 




일은 잘 마무리 했어요?”

도로 물러지지 않을 정도로는 한 것 같습니다.”


장그래씨가 한 거면 충분할 겁니다.”

 




점심 때보다 이젠 자연스럽게 잡는 손깍지처럼 편해진 대화가 흐르고 자신의 손 안에 그래의 손가락이 얕게 꼼지락 대는 것이 느껴지자 해준은 저절로 마음이 넘실거렸다. 그와 동시에 마주한 그래의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 봐오자 넘실거리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쿵쾅 뜀박질을 해댔다. 자신의 어린 연인은 지금 무슨 생각일까, 자신과 같은 마음일까. 해준의 시선은 이내 그래의 불그스름한 입술에 닿아있었다. 꿀떡 목 뒤로 숨이 넘어가는 소리는 그래에게 들리지 않았으면 했다. 이 성급하고 불순한 마음. 혹시 자신 혼자만이 너무 조급하게 달리려 하는 것은 아닐까. 여전히 제대로 된 방법은 몰랐으나 이 소중한 인연을 조금 더 가깝게 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팠던 해준은 전과 달리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마냥 무작정 달리는 자신의 행동이 그래에게 부담스러울까 걱정이 앞섰다. 성급한 자신을 따라오느라 금세 지치진 않을까. 설렘 한 스푼에 걱정 두 스푼인 커피가 잘게 흔들리는 듯 했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혹시

 




걱정을 담은 말이 해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옴과 동시에 곧 로비에 도착할 엘리베이터가 거짓말처럼 정전과 함께 우뚝 멈췄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어둠만큼이나 낮은 정적이 두 사람을 감싸왔다. 깜깜해진 공간에서 느껴지는 건 유일하게 반짝이는 버튼들의 숫자와 꼭 잡은 손의 온기였다. 놓고 싶지 않은 그래의 손을 살짝 힘을 줘 쥔 해준은 떼기 아쉬운 그래의 손을 놓고 전화기 모양의 호출버튼을 눌렀다. 구멍이 송송 뚫려있을 게 분명한 위치에서는 익숙한 경비의 목소리로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이 들려왔다.

 




대리님.”

 




떨어져 썰렁했던 해준의 손 안에는 다시 꿈처럼 계속 감겨있던 체온이 담아져 왔다. 정전만큼이나 생각지도 못한 그래의 손길에 해준은 어둠 속에서도 머릿속이 하얘져 그래의 반질거리는 눈을 마주하기 바빴다.

 




묻고 싶은 게 뭐였는지물어봐도 될까요?

, 그건그러니까


.

혹시라도내가 너무 성급해서 부담스럽다면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 다가와 거리를 좁히는 체온을 해준은 느낄 수 있었다. 사방은 온통 어두웠고 조용했지만 요란스럽게 울리는 심장소리가 도시 한복판에 서있는 것처럼 해준을 어지럽게 했다. 다시 생각지도 못할 만큼 가까워지는 몸과 뺨에 닿는 뜨겁고 떨리는 숨은 남은 거리가 고작 한 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했다. 해준은 마저 그래에게 잡힌 나머지 손으로 떨림을 감추기 위해 저도 모르게 그 작은 손을 소중한 것을 쥐듯 꼬옥 아이처럼 쥐었다.

 




저는괜찮습니다. 저는그러니까

장그래씨.

 




답은 맺어지지 않은 채로 소리 내졌지만 이내 입술 위로 먼저 닿아오는 체온으로 끝을 맺었다. 해준은 포근하게 눌렀다 다시 떨어지는 입술이 제 입가에서 포옥 뜨거운 숨을 내쉬는 것이 아까워 그대로 눈을 감고 다가갔다. 머뭇거리고 걱정했던 만큼 닿아오는 감촉은 달고 뜨거워 제가 어떤 물음을 건네려 했는지도 정전만큼이나 까맣게 잊게 했다. 어쩌면 자신보다 솔직한 어린 연인이 지금껏 느리고 느린 자신에게 맞춰주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확실한 건 멈춰있게만 보였던 관계는 해준 자신의 솔직한 변화로 한 발짝 나아갔다는 것이었다. 깊게 닿았다 떨어진 숨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전등을 뒤로 한 채 또 다시 섞여 들었다. 다시 두 사람만의 정전이었다.

 

 

 

 

해준그래 합작 네 살 차이

키워드: 엘리베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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