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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삼시세끼 上 첫 끼 (W.빙다리 핫바지)





 



해준은 앞머리 속에 살짝 감춰진 눈썹을 들어올렸다그의 신경이 꽤 날카로워졌다는 의미였다그를 잘 아는 해준의 친구는 한참 어색한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다 해준의 앞에 아주 뜻밖의 것을 주욱 밀고는 한 달만 잘 부탁해라는 말만을 남기고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을 빠져나갔다그 공간 안에 남은 해준은 뻣뻣한 고개를 내려 자신의 집 현관을 차지하고 서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장그래입니다한달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깡마른 체구에 단정하게 걸린 교복과 초초한 듯 올려다보는 눈은 어리디 어린 아이의 눈이었다해준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팔자에도 없는 동거의 시작이었다.

 









삼시세끼

강해준X장그래



w. 빙다리 핫바지

 

 

<1. 첫 끼>

 

 

 

해준은 혼자 있는 것을 선호했다정확히 말하자면 타인과 함께 자신의 개인적인 공간에 있는 것을 꺼려하는 터라 제 담당자가 오래 머무는 것 또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그런 그의그만의그를 위한 아파트에 안면식도 없는 고등학생이 들어온다는 건 해준의 골치를 아프게 하는 일임이 틀림 없었다.

 

너밖에 맡길 곳이 없어제발해준아한 달만 부탁한다.’

 

방 계약의 만료와 함께 금전적인 문제로 주거가 위태해진 건 해준이 충분이 도움 줄 수 있는 일이었다그도 그럴게 해준은 지금 꽤 잘나가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이 때가 아니라면 새로 시작할 준비를 할 수 없다며 해준의 원조를 거절한 채 새 직장 준비로 필요한 한 달 정도만같이 살던 먼 친적인 그래를 맡아줄 순 없냐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는 그에게 해준도 날을 세울 순 없었다결국 그 결과는 창고로만 쓰던 작은 방안에 들어찬 자그만 체구였다.

 

뒤통수는 자그맸고 해준 자신이 고등학생일 때보다 작고 마른 어깨였다제 친구와 닮은 것이라곤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잠깐 마주할 때마다 유독 까매 보이는정직한 눈동자뿐이었다날이 선 해준의 신경을 알아차렸는지아니면 본래 조용한 성정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그래라 소개한 아이는 창고로만 쓰던 방 안에서 작은 가방 하나만을 열어 정리하고 있었다.

 

화장실은 여기고 서랍 안에 수건 있으니 쓰고 바구니 안에 넣으면 된다저쪽 방은 내 개인적인 서재니까 들어가지마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궁금한 점은?”

“…폐 끼치는 일 없도록 할게요.”

“…그래.”

감사합니다.”

거슬리게만 행동하지 않으면 돼.”

 

방문을 닫고 고립된 서재로 들어서자 해준은 그제야 굳혔던 몸을 풀고 의자에 기대 숨을 내쉬었다 10여년간 혼자 살던 버릇이 든 그에게 이방인의 침입은 이토록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한 달이라니자신이 아무리 냉담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도 친구의 생애 첫 부탁은 거스르기 어려웠다한 달 동안 영역을 침범 당한 짐승처럼 털을 곤두세울게 분명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해준은 아직까지 지끈거리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댔다예민하게 날을 세운 자신을 보며 갓 태어난 동물마냥 몸을 웅크리며 두려움에 긴장할 그래라는 아이의 소리는 그 동안 홀로 지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기 짝이 없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묘하게 훈훈해진 온도가 해준의 신경을 긁어댔다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해준은 그저 제 성질마냥 날카롭게 깎은 연필을 들어쓰다 멈춘 원고지 위로 사각사각 다시 글씨를 그려냈다.

 

 

 

*   *   *

 

 

 


 

그래는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두르고 뿌얘진 욕실 거울을 손으로 닦아냈다머리카락이 젖은 미역처럼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폭 한숨을 내쉬고 수건을 찾아 서랍을 열자 각을 잰 듯 말끔하게 정리된 서랍 속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현관 앞에서 처음 마주했던 멀끔한 그의 얼굴을 닮은듯 과하게 깔끔한 수건으로 그래는 선뜻 손을 뻗지 못하다 이내 개중에 가장 낡아 보이는 수건 하나를 집었다얼굴의 물기를 닦아낸 수건에서는 보송하고 깔끔한 향기가 희미하게 배어있어 코를 박고는 한참이나 멍하니 생각에 잠겨 차게 식어가는 욕실 가운데에 서있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아저씨…?’

 

친척 형과 같은 나이라면 30살일 테니 자신과 띠를 한 바퀴 돌아 거기에 한 살을 더 보탠 만큼의 차이가 날 게 분명했다형과 있을 땐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이던 차이가 유난히 그와 있으니 불거져 보였다낯설음 때문일까강해준이라고 들었고 유능한 작가라고도 들었지만 그래가 흔히 생각했던 작가의 모습과는 달랐던 그의 태도가 떠올랐다차갑고 각을 맞춘 듯 경계하는 몸짓과 틈을 보이지 않던 눈동자 같은 것들이 다시금 그래의 머릿속을 헤집었다뚝뚝 머리카락에서 흐르는 물기가 어깨를 타고 흘러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졌던 집안 공기처럼 체온도 내려가는 것이 느껴지자 그래는 수건을 머리 위로 덮고 눈을 꾹 감고는 마른 손을 비벼댔다무뚝뚝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그저 표현이 서투를 뿐이지. 어젯밤 다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며 나긋이 말해오던 형의 말을 믿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닦아도 여전히 습한 몸 위로 얇은 옷을 걸치면서도 해준이 있을 거실로 통하는 욕실문 하나 열기가 어려웠다.

 

 

저녁 먹어.”

 

 

달칵문을 열고 나가자 그나마 있던 따뜻한 공기가 훅 식어 어디론가 도망가고는 찬 기운이 물기 어린 그래의 얼굴을 감쌌다싸늘함에 작게 부르르 떠는 그래의 앞에는 아담한 부엌 식탁 위로 수저 2쌍을 놓는 날카로운 옆모습이 고소한 냄새와 함께 어른거리고 있었다샤워소리 때문에 방해가 됐을까혹시나 해준의 일을 제가 그르친 건 아닐지 해준의 등을 바라보다 걱정스러움에 그래는 바닥으로 내리 깔곤 도르륵 제 나이의 아이처럼 눈을 굴렸다뭐라고 말을 건네면 좋을까다정함이 몸에 밴 친척 형과는 달리 거리감이 가득한 인영의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카레 싫어?”

… 아뇨좋아해요.”

“…앉아끼니 때울 시간 놓치면 맛없어.”

“….”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런 몸짓으로 의자를 빼고 맞은편에 앉는 그래를 보며 해준은 벌리려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말을 건네봤자 아이가 두른 긴장감은 쉽게 풀리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 모른 척 구는 것이 차라리 나은 선택일지도 몰랐다자리에 앉아 김이 올라오는 밥을 한 숟가락 뜨며 바라본 거실의 시계는 벌써 한결같이 챙겼던 저녁 식사 시간보다 살짝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겨우 딱 한 사람이 늘었을 뿐인데도 귀찮아 꺼내먹지 않았던 반찬이 식탁 위로 올라오고살짝 늘린 반찬 개수가 유난히 식탁 위를 가득 덮는 것만 같은 이 느낌이또 늘상 먹던 1인분이 아닌 2인분의 요리에 당황해 스토브 위의 냄비에 아직 남은 카레의 양까지 어느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언제나 비어있던 앞 자리에 들어찬뜨거운 김을 유난히 불그스름한 입술로 불어 식히는 아이의 어깨는 그 중 가장 어색한 것이었다입안으로 밀어 넣고 오물오물 거리며 맛있다는 듯 베시시 웃는 입꼬리마저도 가슴께를 간지럽게 하는 낯설음이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됐어들어가서 할 일 해.”

그래도 설거지는 제가…”

그 시간에 가서 머리카락이나 마저 말려.”

“…?”

 

 

그러다 감기 걸린다무뚝뚝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싹싹 비운 그래의 그릇마저 들고 개수대로 향하는 해준의 뒷모습을 보며 그래는 아직 물기가 어린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손끝으로 눅눅하게 묻어오는 물기는 보다 따뜻한 온도를 머금고 미지근해져 있었다신경 써준 걸까다시 바라본 등은 익숙하게 고무장갑을 두터운 팔에 끼고는 너른 어깨를 움직이며 이내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소리를 둘렀다아직도 해준과 자신의 사이에서는 달콤하고 고소했던 카레 냄새가 부엌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카레 정말 맛있었어요…”

”…그래.”

사실… 형이 만들어준 것보다 더…”

 

 

팔을 들어 얼굴에 튄 물방울을 닦아내다 뒤를 돌아보자 반찬통을 닫으며 닦을 것 없는 식탁을 닦아내는 옆얼굴에서는 희미하게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착한 애야너도 분명 마음에 들걸친구의 말처럼 자신에게 그렇게 나쁘지 않을 아이임에 틀림없었지만 묘하게 흐트러지는 평소의 느낌이 해준을 거슬리게 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시키지도 하지 않는 일을 하는 아이를 말릴 필요는 없었다해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손을 놀렸다겨우 그릇 두 개와 수저 두 쌍이 유난히 개수대 안을 가득 메우는 느낌이 들었다.

 

 

추우면 말해난방을 그다지 안 하는 편이라.”

“…괜찮아요.”

“…일찍 자라.”

주무세요... 그리고…”

 

 

창문을 살짝 열어두어 서늘해진 거실 불을 끄며 해준은 식탁 한 켠에 놓아둔 향초에 불을 붙였다자주 붙였는지 어느 정도 옴폭 녹아내린 초의 불빛은 어두운 공간 안에서 제 부름에 고개를 돌려온 해준의 얼굴에 음영을 그려내고 있었다해준의 작은 움직임에도 일렁이는 촛불 그림자를 보다 그래는 왜인지 열기가 힘든 입술에 힘을 줘 말을 꺼냈다허벅지 아래로 떨궈진 손가락으로 애꿎은 바짓단을 입술 대신 움켜쥔 채로.

 

 

감사해요… 저 들여주신 거.”

“………”

… 안 끼치도록 노력할게요.”

“…알았으니까 자얼른.”

 

 

주무세요. 꾸벅 인사를 건네고 돌아선 그래는 그대로 서재 옆의 방문을 열고 뒷모습마저 감추었다돌아서며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얼굴에 이슬처럼 맺혔던 웃음기는 금방이라도 도르륵 흘러내려 흐트러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해준은 조용히 닫힌 문을 바라보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혼자 있는 것처럼혼자 저녁을 먹은 후처럼 소리는 조용했으나 은은하게 불빛을 타고 흘러오는 향초의 향기는 정적을 덮을 만큼 유난히 온기에 젖어있었다.

 

방 안은 싸늘했다그래는 함께 있어 따뜻했던 거실에서 벗어나자마자 훅 끼쳐오는 찬 기운에 살짝 몸을 움츠렸다혹시나 저가 있어 불편하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어쩐지 이젠 촉촉하게 마른 머리카락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서늘한 기운에 못 이겨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는 엎드려 책을 펴고 샤프를 딸깍이던 손은 이내 턱을 괴고 있었다.

 

 

“…어쩌면…”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형의 말처럼 자로 잰 듯 딱딱하고 건조하게 달궈진 말들과 시간 그리고 행동들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다정함이 짧은 시간 동안에도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좋은 사람인 걸 넘어서 생각보다 어쩌면 다정한 사람일지도그래는 이불 위로 드러나 서늘해진 어깨를 이불 속으로 도로 감추며 보송했던 수건처럼 보드라운 베개 위에 뺨을 비볐다푸슬거리는 웃음이 베개에 닿아 소리 감추고는 솜 사이로 따끈한 그래의 온기를 옮아가고 있었다.

 

 

 

*   *   *

 

 

 

 

귓가로 멍하게 들려오는 알람 소리가 한참이나 멀게 느껴져 머리가 제대로 깨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그래는 생각보다 큰 소음에 팔을 뻗어 휘적거렸지만 눈이 화끈거리는 숯덩이에 눌린 듯 잘 떠지지 않아 오늘따라 물 먹은 듯 무겁게 움직이는 몸에 애가 탈 뿐이었다이른 시간인데 혹여나 해준이 알람 소리에 깼을까 몸을 뒤집어 휴대전화를 꾹 누르는 그래의 입에서는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벌써 7. 6 30분부터 맞춰둔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금껏 방치해뒀다는 사실에 그래는 무거운 이마를 끙 손등 위로 내리 눌렀다뜨끈한 것이 분명 어제 으슬거렸던 몸 탓이었다혹시 나 때문에 깼을까천근만근한 몸에도 머릿속에 맴도는 건 그 걱정 하나였다.

 

 

지금 안 일어나도 되는 거…”

… 안녕히 주무셨어요죄송해요저 때문에 많이 시끄러우셨

어디 아파?”

아뇨그냥 조금 찌푸둥해서…”

 

 

생각지도 못하게 문이 열리고 들어온 해준은 어젯밤에 봤던 모습처럼 말끔하게 정돈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계속되는 알람에도 일어날 생각하지 않는 방안으로 들어서자 저와는 다르게 한껏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하고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동자에는 붉은 기가 가득이었다긴 다리로 성큼 다가와 그래의 동그란 이마 위로 커다란 손바닥을 올리자 홧홧한 열기가 해준에게 전해져 왔다자신이 열이 많아 차게 살던 버릇이 그래에게는 맞지 않았음을그럼에도 투덜 한 번 대지 않고 밤새 떨었을 그래를 생각하자 뒷목이 뻐근하게 굳어 해준은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 감았다제게 뭔가 미안한지 사과의 말을 건네오는 목소리는 열로 갈라져 형편 없었지만 애써 웃어 보이려는 입꼬리가 고집스러웠다괜찮다며 몸을 일으키려는 그래의 팔을 잡아당겨 앉히고는 해준은 이불로 그래를 서툴게 꽁꽁 싸매듯 덮었다.

 

 

너 아파누워 있어.”

아녜요…! 막 일어나서 그러는…”

조용히 해그리고 오늘 학교 갈 생각하지 말고.”

정말 괜찮은데…”

 

 

마른 입술로 웅얼거리면서도 제가 덮어준 이불에서 어쩐지 나오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내려다 보던 해준은 그대로 바닥에 놓인 그래의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여기에 담임 선생님 번호 있지굳은 목소리로 내뱉으며 눈을 마주해오는 해준에게 그래는 이불 끝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선생님장그래 담임 선생님 되시죠. 해준의 입술에서 예기치 않게 나온 제 이름에 그래는 괜히 이불을 끌어 입술 위를 덮었다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네조용하고 낮은 해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래는 눈을 꾸욱 감았다어쩐지 어렸을 적 들었던 아버지의 낮은 자장가 소리 같아 감은 그래의 눈에서는 열기로 데워진 눈물이 흘렀다.

 

 

“…… 아저씨…!”

폐 안 끼친다며 바로 끼치는 건 대체 무슨 취민지.”

 

 

속을 꿰뚫는 직설적인 말과 함께 이불 안에 뜨끈하게 녹고 있던 머리가 공중으로 들어올려지자 그에 놀란 그래의 손이 휘적이다 감은 것은 해준의 목이었다단단한 어깨에 놀라 감은 팔을 떼다가도 이내 축 늘어진 몸에 흔들리는 머리를 그 어깨에 기대고 그래는 숨을 몰아 쉬었다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말은 쉽사리 내뱉기가 어려웠다.

 

다른 곳보다 유난히 찬 그래의 방에서 발을 옮긴 해준은 그대로 그래를 들어 안은 채 제 침실로 향했다그래가 있었던 방보다 조금은 훈훈한 공기가 느껴지자 응석 부리듯 몽롱한 와중에도 어깨에 뜨거운 뺨을 비비는 그래를 해준은 잘 정리해둔 침대 위로 눕혔다옆으로 기울어진 아이의 얼굴 옆선은 아직도 어리게만 보였다더운 숨을 쌕쌕 내뱉는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어렸다하지만 그 입에서 뱉은 말은 어울리지 않게도 속을 꾹꾹 눌러 담은 것이라 해준의 눈썹을 순간 일그러뜨렸다.

 

 

“…죄송해요…”

“…추우면 말을 했어야지.”

다음부턴 절대 안 아플

됐다혼내는 거 아니야.”

 

 

해준이 그래의 턱까지 이불을 끌어올려주자 그 끝을 움켜쥐고 눈을 감는 그래의 얼굴에선 어젯밤보다 더욱 짙은 미소가 그렁그렁 매달려있었다해준은 빤히 열로 젖어 눅눅해진 그래의 눈썹을 바라보다 몇 번을 머뭇거렸던 손을 들어 그래의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쓸어 넘겼다그에 베시시 웃어오는 그래의 입가에선 푸슬거리는 웃음소리도 함께 흘러나왔다.

 

 

“…좀 자.”

“…저씨…”

“………”

“…아저씨는… 다정한 사람인 것 같아요…”

“….”

 

 

꿈결처럼 몽롱한 그래의 목소리를 듣고 손길을 멈추자 그래의 숨소리도 이내 금세 고르게 변해갔다아무도 들인 적 없던어떤 곳보다 개인적인 공간 안에 들어선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해준은 버석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다정한 사람이라는 말늘 날이 서있던 자신에게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던 수식어를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순진하게 뱉어온 아이에게 어떤 얼굴을 보여야 할까아직도 자신은 혼자 있을 때의 서늘함에 비해 달아오른 이 공기가 어색하기만 했다불편했다그럼에도 해준의 손은 그를 불편하게 하는 이 온도가 조금 더 그 작은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게 하는 숫자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버튼 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아직 초가을의 날씨에도 피부에 닿는 공기가 서늘한 건 어제 하루 종일 데워진 집안 속에 머문 탓이었다. 그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꼬마 아이처럼 코를 훌쩍이다 손에 들려진 밤색의 머플러를 들어올려 바라보았다. 두르고 가. 두르기엔 아직 이른 날씨라고 생각하는 건 분명 해준도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그래는 보드라운 것 위로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베시시 호선을 그려냈다. 괜찮다는 말 말고 감사하다는 말을 한 번 더 할 걸.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오르며 중얼거리던 그래의 목덜미에는 손에 들렸던 머플러가 둘둘 감겨 보드라운 감촉으로 이내 턱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찬 공기도 두렵지 않게 하는 집안의 따스했던 공기가 그대로 다시 닿아오는 듯 했다.


벽이 허물어지는 건 그렇게 아주 간단했다. 그동안 그래의 목에는 내내 해준이 쓰던 밤색의 머플러가 둘러져있었고 그래가 일어나는 순간부터 그래와 다시 먹는 저녁까지 보통 작가 답지 않게 규칙적인 해준의 생활 패턴은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다만 달라진 건 어느 순간부터 설거지의 몫은 그래가 되었다는 사실과 그래가 웃어보이는 빈도수에 비례해 그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려주는 해준의 손이 잦아졌다는 것이었다. 



"저녁 먹어."

"…네에"

"…내 책은 그만 보고."

"…네에"



달라진 것 중에 해준이 가장 강하게 느낀 건 어느 순간부터 거실의 책장에 있는 책을 꺼내 읽는 그래가 저보다 더한 책벌레였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쉽게 놓지 않는 책에 그 뒷모습을 유심히 보던 해준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팔을 뻗어 그래의 머리 위로 책을 들어올렸다. 또 자신의 책을 골라 읽는 중이었다. 아쉬운 듯 아아, 하고 작은 탄식을 뱉어오는 그래를 뒤로 하며 해준은 그대로 이젠 둘이 앉아 있는 것이 익숙해진 식탁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발을 옮기자 당연한 듯 따라와 자리에 앉는 그래에게 상을 주듯 다시 책을 건네자 그래의 입꼬리가 웃음을 머금고 마주봐왔다. 자신의 책을 받아 꼭 보물처럼 식탁 옆에 내려놓는 그래를 내려다보는 해준의 얼굴은 언제나와 같이 별반 다를게 없었지만 미묘하게 움찔 올라갔다 내려온 눈썹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훈훈한 공기는 식탁 위를 돌고 거실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오가는 말은 적었지만 그래의 웃음기는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지워질 생각을 못한 채 식탁 전체를 덮는 듯 했다. 잘 먹었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두 개의 의자는 뒤로 빠져나왔고 제 팔뚝보다 헐거운 고무장갑에 낑낑대는 그래에게 다가가 소매 위까지 올려주는 해준의 손은 말 없이도 자연스러웠다. 시원하게 튀는 물줄기와 언제나처럼 식사 후에 피우는 향초 향기가 은은하게 공기 위를 덮어 향긋하게 거리감을 메워왔다. 



"…어라…?



라벤더 향기가 어느 정도 거실을 채워갈 때 쯤 초 하나만을 두고 빛이 사라진 건 생각하지 못한 일이라 그래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와 초 옆에 있는 해준의 티 끝을 잡아왔다. 정전인 거예요? 물어오는 그래의 말에 해준은 팔을 뻗어 자연스럽게 그래의 어깨를 감싸쥐고는 식탁에 앉혔다. 혹시나 겁을 먹진 않았는지 자연스레 살피는 눈도 해준의 것이었다. 잠깐 앉아 있어. 마주한 눈이 도리어 저를 살피는 것을 알고 해준은 뒤돌아 얼굴을 쓸었다. 걱정하고 있는 걸까, 나를. 우습고 낯설은 기분이었다. 아이에게 걱정을 받는 아저씨라니. 금방 돌아올 거예요. 그렇게 뒤돌은 해준을 위로하는 말에 해준은 결국 입꼬리 끝에 웃음기를 매달았다. 그래, 금방 다시 들어오겠지. 방금 식사를 한 것처럼 다시 식탁에 앉은 그래와 해준의 사이로는 작은 초들이 여러 개 놓여있는 상태로 전기가 들어오길 기다렸지만 결국 전기 대신 두 사람을 메운 건 아직도 은은한 라벤더 향기와 그래의 교과서, 그리고 서재 밖으로는 꺼내온 적 없던 해준의 원고지였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카페의 한 켠에 앉은 것처럼 은은하고 따스한 불빛이 딱 좋은 온도로 공간을 채워가고 있었다. 해준의 사각이는 연필 소리, 책넘기는 그래의 손가락, 가끔 딸깍이는 그래의 샤프심. 공부를 마친 듯 책을 덮고 자신의 손가락을 봐오는 시선에 해준이 고개를 들자 시야는 낮아져 괸 팔 사이로 기대어 마주봐오고 있었다. 들어가서 자. 해준의 말에 그래는 팔에 턱을 괸 채 좌우로 작게 고개를 굴렸다. 아직 안 자고 싶어요. 눈에 초가 담겨 어른거려 어쩐지 더 깊어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주황색의 그림자를 담아내고 있었다. 반쯤 감겨 접혀진 눈꼬리엔 자장가 소리를 듣는 듯 편안함을 가득 안고 있어 해준은 한참을 바라보다 짙어지는 제 시선을 거둬 잡고 있는 연필심으로 돌렸다.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저도 어른이 되면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반쯤 감겨 나른하게 뜬 눈동자는 여전히 제 손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준은 물음에 멈칫했던 손을 다시 움직여 사각사각 종이 위를 긁어내려갔다. 나이는 상관 없어. 낮은 해준의 목소리는 촛불의 빛보다 옅었다. 하지만 향기보다는 그윽했다. 얼마나 진솔하느냐에 달려있을 뿐이야. 해준은 제가 뱉은 말에 더러 손을 멈추었다. 진솔함, 어느 누구보다 제게 어울리지 않은 단어를 뱉는 자신은 누구인가 싶었다. 그것도 가장 솔직하고 정직한 눈빛 앞에서 자신이 어떤 말을 뱉었나 싶었다. 아아. 해준을 기다린 건 작은 긍정의 탄식이었다. 아주 솔직하고 잠에 반쯤 담구어 진듯한 목소리로 만든 깨달음의 탄식이었다. 거짓말을 한 아이처럼 해준의 맥박은 더욱 목안에서 녹아내리는 촛농의 양만큼 울려댔다. 


 

 

“아저씨, 오늘 책에서 봤는데

""

삼시세끼를 함께 한다는 것엔 큰 의미가 있대요.”

""

"그래서 식구. 먹을 식에 입 구라는 한자를 써서 그래서 식구래요. 신기하죠."

"…"



턱을 괸 채 옅게 타는 촛불을 바라보던 그래의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그에 그래의 손에서 놓아진 샤프가 해준 쪽으로 도르르 천천히 굴러왔다. 해준은 제게 굴러온 샤프를 잡고는 그래의 손끝을 바라보다 이내 숨이 고르게 변한 그래의 얼굴로 드리워지는 음영을 훑었다. 어렸다. 어린 아이였다. 그리고 그 볼을 쓰다듬는 자신도 어린 아이가 되어갔다. 식구. 식구라고. 너와 나를 묶는 단어가 생겼다고. 아이가 뱉는 말은 이상하게도 수십가지 단어로 글자를 써내려가는 자신에게는 유난히 낯설었다. 그리고 고르게 움직이는 그 작은 어깨에 얇은 담요를 덮어주는 자신의 손도 낯설기 그지 없었다.


 



해준그래 합작 네 살 차이

Keyword: 식사를 합시다.

삼시세끼 上 첫 끼–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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