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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Breakfast (W. 꽃단지)

 눈을 뜨자 품에 안긴 그래가 보였다. 위잉-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가 천진한 소리를 냈다. 그 위로 매미 우는 소리를 한 꺼풀 덮었다. 더운 날씨였다. 선풍기 방향이 조금이라도 틀어졌다가는 금방 피부 위로 땀이 새어나올 듯한 그런 날씨였다. 내일은 좀 더 더워질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조금이나마 덜 절망적일 수 있는 것은 에어컨이 있기 때문이다. 회사, 버스, 지하철, 어디를 가더라도 에어컨을 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어제 저녁부터 밤새 에어컨을 틀지 않은 데에는 오랜만에 자고 가기로 한 그래의 고집이 한 몫 했다.


"전기를 아껴야 한다니까요."


 작년의 전력난을 근거로 들어 하는 말이 전기 아끼기에 동참해야 한단다. 내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토를 달면, 마치 회사에서 새로운 사업에 대해 프레젠테이션 하듯이 통계 자료라든지 뉴스 보도 자료라도 내밀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장팀장님."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열심히 설명하는 그래의 열정에, 결국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장팀장'이라는 호칭을 부르며 존칭을 하자 그래가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전력에 여유가 있다는 말도, 우리가 조금 아껴봐야 전력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그래가 원인터에서 새 출발을 하고, 그에게 세상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언젠가 그래가 말하기를, 그는 바둑 밖에 모르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랬던 그래는 이제 사회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생각할 줄 알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젯밤 침대 한 쪽에 누운 그래를 껴안으니 더워서 그런건지 으응- 하며 싫은 소리를 냈었다. 그러게 에어컨 틀자니까. 그래도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와 마음을 주고받은 뒤로 가끔 무뚝뚝하게 굴어 그가 불안해한 적은 있지만, 그래도 제가 한 일에 모처럼 뿌듯해하는 그래의 기분을 망칠 만큼 눈치 없는 애인은 아니었다. 더운지 몸을 이리 저리 틀면서도 올라간 입 꼬리가 눈에 들어왔었다. 안긴 자세가 마냥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잠들어 있는 그래의 어깨를 감쌌던 팔을 슬그머니 빼냈다. 그럼에도 깨려는 움직임은 커녕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곤히 잠든 듯싶었다. 어젯밤 더위에 고생하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 잠이 부족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래가 자는 사이 알람도 꺼 두었다. 나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해주겠다며 알람을 맞춘 그래가 그 사실을 알면 짜증을 낼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좀 더 재워야 했다. 이번주 내내 피곤했을 그래를 위해 그래가 차려주는 첫 식사는 미루기로 했다. 슬그머니 일어나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내게 등을 돌린 채 누워있는 그래의 위로 몸을 숙였다. 얌전히 감긴 눈가에 입을 맞추려다 그만 두었다. 아직 그래를 깨워서는 안 되었다.





 부엌으로 가 앞치마를 맸다. 물 네 컵, 다시마 한 장, 멸치 조금, 두부, 된장, 양파. 그래가 오늘 아침 메뉴로 점찍어둔 된장찌개의 레시피다. 그래가 포스트잇에 적어 냉장고에 붙여둔 방법을 따라 찌개를 끓였다. 센 불 위에 올려둔 찌개 냄비가 부글부글 잔뜩 성을 냈다. 






"그래야."

"……."

"장그래."


 그래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작지 않은 목소리로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못했다. 그만큼 피곤해 하는 그래의 모습은 지난 일주일간 어떤 날들을 보냈는지 짐작하게 했다. 그래는 원인터에서 차차 그동안의 실적을 인정 받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고졸 검정고시 출신 낙하산이라는 꼬리표는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편견과 함께 계약직의 한계 또한 여전히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같은 회사에 있지만 그의 동기들이나 그의 사수 김대리가 그랬듯이, 내가 힘들어하는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알기에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장그래씨."

"……."

"장팀장님."


 네 번째 불렀을때, 장팀장이라는 말을 꺼내자 그래는 이제야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장팀장님이라고 불렀을 때 처럼 그래가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식사합시다. 장팀장님."

"꼭 부부 같아요."


 차려둔 식탁을 본 그래가 졸린 눈을 하고 덜 깬 목소리로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듣고 보니 그랬다. 그래가 말한 대로 부부 같은 모양새였다. 함께 잠들고 일어나 아침을 함께하는 일상. 누구나 꿈꿔왔을 그런 장면이었다.


"그러네요. "


나의 긍정에 그래가 다시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