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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Your Name (w.꽃단지)

 강해준. 오른쪽 소매를 들추면 보이는 세 글자는 철강팀 대리님의 이름과 똑같았다. 회사 사람들에게 이 네임을 보이지 않기 위해 봄, 가을, 겨울에는 소매 아래로 손목을 감춰야 했고 여름에는 두꺼운 손목시계를 차야 했다. 왜 왼손이 아닌 오른손에 시계를 차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적당히 대꾸할 말이 없어 웃어 넘겨야 했다.

 부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손목에 이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몸에 누군가의 이름을 새기고 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엄마, 아빠라는 호칭이 입에 익고 아는 단어가 많아져 제법 긴 문장을 말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글자가 없는데 왜 나만 손목에 이런 게 있냐는 질문에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네임. 엄마는 손목 안쪽에 가지런히 놓인 이 글씨를 그렇게 불렀다. 내 운명의 상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거라고 했었다. 손목에 있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자 호기심은 더 커졌다. 남자이름처럼 보이는데 예상대로 정말 남자일까, 나보다 나이가 많을까 적을까. 눈은, 입은, 또 코는 어떻게 생겼을까. 이 까맣고 가느다란 글씨가 그렇듯이 단정한 사람일까. 그 사람에게도 내 이름이 있을까. 어릴 적에는 내가 사랑하게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에 대해 이런저런 궁금증을 품었었다. 이렇게 회사에서 네임의 주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정말로 그 사람에게 마음을 주게 될 것도 알지 못했었다.

 

장그래.”

?”

 

 네임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들려온 오차장님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걷어 올렸던 소매를 다시 내리면서 차장님이 앉아계신 방향을 보고 섰다. 다행히 차장님이 멀리 앉아계셨던 덕에 손목에 새겨진 네임을 보지는 못하신 눈치였다.

 

뭐야, 뭘 놀라고 그래. 장그래, 이거 철강팀에 갖다 주고 와.”

알겠습니다.”

 

 

 

 

 

 

 

대리님, 저희 팀에 요청하셨던 서류 여기 있습니다.”

 

 모니터에 띄워진 서류를 검토하던 대리님이 돌아보았다. 고마워요. 그의 눈길이 내 눈과 맞물렸다. 대리님과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오른쪽 손목 언저리로 떨어뜨렸다. 강대리님의 앞에만 서면 그의 이름이 쓰여 있을 손목이 자꾸 신경 쓰였다.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을 깨달은 이후로 늘 그래왔다. 네임을 보이는 건 대리님에게 마음을 강요하는 일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강대리님이 내 시선을 따라 손목을 살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힘을 뺀 손을 폈다가 오른손을 다시 둥글게 말아 이번에는 셔츠 소매 끝을 살짝 쥐었다. 소맷자락이 손목을 감싸고 있었지만, 행여나 안쪽이 들여다보일까 싶은 마음에 꼭 당겨 잡아서 시선이 닿지 못하게 막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지막으로 뒤돌아섰다.

 

그런데 장그래씨.”

?”

 

 혹시 네임을 알게 된 걸까. 신경 쓰지 못한 사이에 소맷자락 사이로 글자가 보이기라도 했다면? 나를 외면하듯 아까부터 줄곧 내게 등 돌린 채 서류만 보고 있던 장백기씨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돌아봤다. 좀 더 자신감 가져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대리님의 눈치만 보고 있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인턴이 아니라 신입사원이잖습니까. 지금처럼 눈치만 볼 것 없다는 말입니다. 손목에 있는 네임을 들킬까봐 초조해하는 모습이, 자신감이 없어서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비춰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장그래씨가 맡은 일은 책임질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좀 더 자신감 가져요. 대리님이 웃어보였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장백기씨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대리님에게는 그런 의도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적어도 나에게는 대리님의 말이 내 능력을 믿는다는 격려의 말로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능력을 믿어주고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장그래씨. 이거 마시고 해요.”

강대리님.”

 

 거의 모든 사람이 퇴근한 금요일 밤, 한참을 서류 검토에 집중하고 있으니 내 앞으로 종이컵 하나가 내밀어졌다. 상사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킨 꼴이 되어버렸다. 하얀 종이컵을 채운 연갈색 액체가 천천히 흔들렸다. 옅은 커피향이 코를 간질였다. 막 탕비실에서 가져온 듯,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에서는 하얀 김이 폴폴 솟았다. 대리님을 향해 몸을 돌리다 언뜻 보인 창문 밖은 이미 어둠이 가득했다.

 

제가 타다드렸어야 하는데…….”

걱정 말고 마셔요. 부하 직원한테 커피 심부름 시키는 거 즐기는 편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

 

 대리님이 내게 건네던 종이컵이 미끄러진 것은 순간의 일이었다. 기우는 종이컵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오른손이 커피로 적셔졌다. 갑자기 피부 위로 훅 느껴지는 뜨거움에 작게 비명같은 소리를 냈다. 손등 위로 쏟아진 연갈색 액체는 손목으로 흘러 셔츠 소매까지 젖게 만들고 말았다. 놀란 얼굴의 대리님이 내 팔을 붙잡고는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들었다. 젖은 손등을 닦자 흰색의 얇은 휴지들은 금방 갈색으로 젖어들었다. 그는 다급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장그래씨, 팔 걷어요, 얼른.”

대리님, 그냥 제가 알아서…….

 

 아무리 휴지로 닦아낸다고 해도 젖은 옷은 여전히 뜨거웠다. 계속 입고 있으면 화상을 입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옷을 걷으라고 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손목을 덮고 있는 옷을 걷었다가는…….

 

“강대리님……!”

 

 셔츠 소매를 걷으라고 내게 말하던 대리님은 내가 망설이고만 있자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손목으로 옮겨 잡았다. 단추가 풀려나가고, 숨기려고 했던 손목이 드러났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는 손목의 네임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모를 것 같았습니까? 알고 있었냐는 내 질문에 그가 되물었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 앞에서 자꾸 손목을 숨기려고 하는 게 보여서 거기 네임이 있겠구나, 싶었죠. 장그래씨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왜요?”

나한테도 있거든요. 네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에 불쑥 질문이 튀어나갔다. 상사에게 왜요?’라니, 예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데, 대리님이 팔을 내밀었다. 장그래. 나와 똑같은 오른쪽 손목, 똑같은 위치에 내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에게 내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그가 나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한다는 증거가 되어주지 않았다.

 

좋아합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그가 그렇게 말했다.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랬다. 그의 말에 나는 웃어보였고, 웃음의 의미를 알아챈 그가 가까이 다가왔고, 사람 없는 사무실에서 우리는 첫키스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