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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香 (W. 난나)

♬ Sarah Chang - Chaconne

합작 아홉번째 주제, '커피' 입니다.


[해준그래] 香 (향)

  조선 호텔, 아니 조센 호테루는 최초의 서양식 호텔은 아니지만 조선총독부와 경성 역에 중간에 위치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조센 호테루는 그 당시 최고의 호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커다란 식당은 사람들로 붐볐고, 프랑스식 식사는 서양인들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사교실은 당대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만나 관계를 쌓는 곳이었는데, 종종 이곳에서 사회 지도층의 자제들이 맞선을 보기도 했다. 그것은 그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래는 그래의 쌍둥이 누이가 이 자리에 나왔음이 옳았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로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떠나버렸다. 당장 마음이 급했던 부모는 사람을 풀어 그래의 누이를 찾으며 한편으로는 그래를 여자로 꾸며 조선 호텔로 떠밀었다. 그래라고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래가 가문의 체면을 위해 조센 호테루로 향한 것은 아니다. 친일파 집안에 입양된 그래는 쌍둥이 누이와 다르게 조선 독립을 꿈꿨다. 그렇기에 이번 맞선을 일종의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들키면 아마 즉시 총살당하겠지만 작은 총을 두터운 망토에 숨겼다. 얼굴에 분칠을 해본 것이 처음이라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 모퉁이만 돌면 사교실이 나타난다. 그래는 목을 가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를 매서 목젖이 보일 리 없음에도 그는 긴장했다. 또각또각 불편한 구두소리는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내는 것처럼 들렸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선율이 아름다웠다.

  “안녕하세요.” 

  “하세 양이신가요? 카미쿠모 대위입니다.”

  “그냥 유끼꼬라고 불러주세요, 대위님.”

  "유끼꼬양, 좋습니다.“

  멀끔한 남자가 제복을 입고 그래를 반겼다. 남자 목소리라는 것이 들킬까봐 조심하며 말하다보니 지나치게 목소리가 떨렸다. 아마 상대는 그래가 너무 긴장해서 목소리를 떠는 거라 생각할 것이다. 카미쿠모가 빼 주는 의자에 그래는 살포시 앉았다. 짙은 눈썹과 강인한 눈매, 꽉 다문 입술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하지만 저 사내도 일제의 개일 뿐이다. 그래는 커피 잔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구역질나는 저 치의 향을 조금이라도 맡고 싶지 않았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따뜻한 기운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눈을 감으며 커피의 향과 맛을 음미하던 사이 카미쿠모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그래에게 말했다.

  “누이 대신 나온 것은 형제애입니까, 아니면 가문의 체면 때문입니까?”

  순식간에 그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입 안에서 굴리던 커피를 꿀꺽 삼키고는 망토 안에 손을 넣었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카미쿠모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래는 자신이 불리한 조건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카미쿠모는 몸을 반쯤 일으켰고 그와 동시에 그래는 손을 꺼내려 했지만 그에게 제지당했다. 그는 그래의 귀에 속삭였다.

  “내일 밤 술시(戌時), 아네모오네에서 봅시다.”  그래는 그의 말에 몸이 굳었다. 아네모네는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기지라고 해도 좋을만한 곳이었다. 낮에는 다방이라 종종 일본인들도 오긴 하지만 도대체 왜 이 곳이 아닌 아네모네에서? 카미쿠모는 한마디 덧붙였다. 

  “마담에게 아네모네 한 송이를 달라고 하시오.”

  그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런 그래를 에스코트 하는 카미쿠모의 모습은 젠틀맨 그 자체였고, 촉망받는 일본군의 대위였으나 그래는 그 한 마디로 그의 실상을 알아챘다. 그는 독립군이다.

  카미쿠모 대위의 이름은 강해준. 일본군 소속이지만 사실 그는 몰래 정보를 빼내는 일을 맡고 있었다. 아네모오네의 마담과는 그래 저보다 훨씬 인연이 깊었다. 그래는 마담에게 미리 알려주었으면 좀 좋으냐고 입을 내밀고 투덜거렸지만 마담은 미소를 지으며 그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개 마담인 내가 무시무시한 카미쿠모 대위님의 비밀을 알려주면 안 되지. 제복 차림이 아닌 해준의 차림새는 와이셔츠에 검정 조끼, 검정 양복바지로 훌륭한 모던 보이처럼 보였다. 시간이 깊어지자 마담은 축음기로 재즈 음악을 틀었고 해준의 그래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해준의 손에 끌려갔다. 무엇보다 해준의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웬만한 잡일로 단련된 그래보다 월등히 셌다.

  “이렇게 한 배를 탄 것도 반가운데, 춤이나 춥시다.”

  “저는 춤은 영 꽝입니다, 대, 아니 강 형.”

  “원래 배우면서 느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잘 출 필요도 없습니다. 마담께 어지간히 잘 보이고 싶으신가보지요?”  그래는 얼굴을 붉히면서 재즈 음악에 맞추어 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간만에 지어보는 웃음이었다. 해준의 손을 빌려 턴 하고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둘은 마주보며 인사했다. 노래 한 곡이 끝나고 해준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마담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옆에서 사진이라도 찍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시동의 목소리가 새로 시작 된 노래에 섞여 들어갔다.

  조선 호텔, 아니 조센 호테루의 식당에서는 종종 큰 연회가 벌어졌다. 예로 망명 높은 두 집안 자제의 결혼식 피로연이나 국가적 행사를 들 수 있다. 그곳에 해준은 카미쿠모 대위로, 그래는 유끼꼬 양으로 참석했다. 다소곳하게 다리를 모으고 앉은 그래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클러치의 고리를 당긴다면 이것은 곧 폭탄이 될 것이다. 피로연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샤콘느(chaconne)가 연주되었다. 해준과 그래가 처음 만났을 때 조센 호테루 사교실에서 축음기로 울려 퍼졌던 바로 그 곡이었다. 바이올린의 선율을 들으니 그 때 마셨던 그 커피의 향기를 입에 그대로 머금은 듯 했다. 그래는 해준의 팔에 팔짱을 끼웠다. 모두가 해사하게 웃으며 신랑 신부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는 이 상황, 하지만 역겹기 그지없는 이치들에게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강 형.”

  “이름을 불러도 좋소, 나는.”

  “해준씨.”

  “우리 행복 합시다.”

  마치 둘의 피로연장인 것처럼 둘은 서로를 감싸 안았다. 일본인들의 시선이 둘에게 향했다. 사실 해준씨, 당신과 마셨던 커피가 처음 마셔보는 커피였지 뭡니까. 그걸 알았다면 조금 더 자주 함께 마실 걸 그랬지요. 이내 폭음이 들려왔다. 둘은 고요하게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