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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마지막의 마지막 (W. 난나)

어느덧 10개 주제로 달려온 해준그래 합작의 마지막이 찾아왔네요.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주제는 '마지막' 입니다.


[해준그래] 마지막의 마지막

  “해준씨, 우리 헤어질까요?”

  해준의 집에서 DVD를 보던 날이었다. 해준과 그래의 영화 취향은 맞는 듯 묘하게 비껴갔다. 보통은 그래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결제해서 보거나 해준의 DVD 컬렉션에 있는 영화를 아무거나 골라 틀었다. 둘 다 영화를 제대로 본다기보다는 화면을 멍하게 응시했다. 가끔은 그래가 영화에 집중해 해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바싹 궁둥이를 붙어 앉아 입을 벌리고 화면을 바라보기도 했다. 해준은 그런 그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영화가 재미없으면 재미없는 대로 그래는 해준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그날도 그저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영화가 재생되는 티브이 화면에서는 여자가 한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해 힘들어한다.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다른 남자는 이미 타인을 마음에 품은 여자를 사랑하고 만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 장면에서 그래는 말을 꺼냈다. 해준은 여전히 티브이 화면을 응시하는 그래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진심입니까?”  

  그래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은 더더욱 못했다. 이걸로 그래는 스물아홉 번째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그래는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하는 주제에 떨리는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주로 해준이 어머니와 통화를 한 그 이튿날 그래는 침묵에 잠겨있다가 헤어지자고 툭 하니 말을 꺼냈다. 해준은 그래가 왜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해준의 그래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럽게 감기는 살은 익숙했다. 해준은 그래의 뒷목에 천천히 키스했다. 뒷목에서 시작된 키스는 척추까지 내려갔다. 그래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엉덩이를 뺐지만 해준은 뒤에서 그래를 꽉 안았다. 힘이 들어가 있던 그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영화는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고 둘은 가만히 그렇게 껴안고 있었다.

  해준과 그래의 연애는 여느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누구보다 차가워 보이는 해준과 도통 연애에 있어 적극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그래였지만 실제 둘의 연애는 뜨겁기 그지없었다. 같은 회사일 때는 하루가 멀다고 만났고, 다른 회사가 되었을 때는 해준이 그래의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일은 흔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의외로 해준은 스킨십에 대범해서 그래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주말이 되면 그래는 어머니에게 친구의 집에 간다 말하고 해준의 집으로 갔다. 점점 해준의 집에 그래의 물건이 늘어나면서 그래는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가지 않아도 되었다.  종일을 몸을 꼭 붙이고 밖에 나가지 않을 때도 잦았다. 침대에 누워 해준이 그래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치면 그래가 얼굴을 돌려 해준을 바라보았다. 배고프다며 배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해준이 키득키득 웃으며 맨살인 그래의 몸을 끌어안았다. 느지막한 점심은 짜장면으로 대충 때우고 해준의 옷을 빌려 입은 그래는 해준의 옆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해준도 그 모습을 바라보다 그래의 옆에서 잠들었다. 크게 다를 바 없는 주말이 그 때는 너무도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냥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여전히 둘은 서로를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믿었다.

  사랑해서 너를 보내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가사에나 나올 법하다고 생각했다. 여자와 마주 보며 커피를 마시는 해준을 보니 속이 쓰렸다. 너무도 잘 어울렸다. 둘은 아마 웨딩드레스를 맞추러 가도 잘 어울릴 것이다. 유모차를 끄는 모습도 자연스러울 테고, 손을 잡거나 키스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는 레몬차가 반이나 넘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마침 비까지 내렸다. 청승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청승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는데도 비를 맞으며 뛰었다. 차가운 빗물 사이로 뜨거운 빗물이 종종 느껴졌다. 홀딱 젖은 채로 버스나 택시를 타기에는 영 민망했다. 급한 대로 멀지 않은 해준의 집에 들어갔다. 헛웃음이 나왔다. 해준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들어온 곳은 해준의 집이었다. 해준말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의 세계는 어느새 해준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래는 그 다음 날부터 종종 헤어지자고 말을 꺼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해준은 충격에 들고 있던 컵을 떨어트릴 뻔 했다. 그래는 해준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애꿎은 벽이나 바닥만 보았다. 제가 얘기를 꺼내놓고도 붉어지는 눈시울을 보고 해준은 그래를 꽉 껴안았다. 그래는 해준의 품에 묻혀 울었다. 그렇게 넘어가나 싶었다. 하지만 그래는 해준이 종종 어머니에게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을 때마다 혹은 그림 같은 가족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싸우기도 하고 해준이 달래기도 하고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급하게 서로의 몸을 탐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준이 한 번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 그대로 집에 돌아왔던 적이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 머리가 차가워져 그래에게 다시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해준이 몇 시간 전까지 둘이 함께 있었던 한강 둔치로 급하게 차를 몰고 갔더니 그래는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등이 외로워 보여 해준이 그래에게 다가가 안은 순간 깨달았다. 자신도 외로웠다. 아무리 그래의 손을 쥐어도 마음만은 쥐어지지 않았다. 그래는 미동이 없었다. 해준도 그래 옆에 앉았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둘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문 앞에서 망설이던 그래는 초인종을 눌렀다. 비밀번호를 누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준이 비밀번호를 바꾼 것을 알게 된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그랬다. 이내 해준이 문을 열었다. 그래는 마지막으로 가장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준은 그래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들고 나왔다. 그래는 스스로 가져가겠다 했지만, 굳이 해준은 태워준다며 그래를 주차장으로 이끌었다. 익숙하게 해준이 그래의 벨트를 매주었다.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제 단 하나가 변할 차례였다.

  “그래 씨, 우리 헤어질까요?”

  “……네.”

  서른 번째 이별의 말은 해준이 꺼냈다. 마지막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