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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삼시세끼 下 세 끼 -fin. (W.빙다리 핫바지)





bgm. 40(포티)-듣는 편지




해준은 책상에 팔을 괸 채 제 너른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 쥐며 앓는 소리를 목안으로 삼켰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연필은 꾹 눌러쓴 힘에 심이 부러져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원고지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자괴감에 한껏 빠져있어도 머릿속엔 터질 만큼 많은, 지워지지 않을 기억들이 있었다.

 

아이의 도톰한 입술을 어둠 속이라는 핑계를 대고 수십 번 훔치고 혀로 옭아맸었다. 여리디 여린 숨결을 목 안으로 삼키고 제 목을 동아줄마냥 끌어안은 부드러운 팔을 손바닥 가득 쓰다듬다, 들어가서는 안될 어린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저씨. 미성숙한 목소리로 저를 부를 때마다 벅찬 마음을 담아 과일처럼 붉게 여물고 있는 뺨에 입술을 문질렀다. 감당할 수 없는 열을 품고 아이의 다리와 엉켜 제 품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느다란 몸을 품 안 가득 끌어 안았다. 한참 옭아매고 섞였던 혀가 떨어지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물기가 어린 입술 사이에선 미처 고르지 못한 숨을 흘려 보내며 제 어깨를 잡아왔다.

 

 

“…하아아저씨…”

“………”

“…숨을, 못 쉬겠어요…”

“…나도, 그래.”

 

 

어깨를 짚은 손가락 사이로 다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손바닥 가득 어둠 속에서도 하얀 손을 끌어 쥐었었다. 어둠을 찢고 내려다본 얇은 눈꺼풀이 떨리며 솔직하고 진중했던 까만 눈동자 위로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헐떡이는 숨이 입가에 닿아 습해지자 마음이 달아 참지 못한 채 달기만한 아이의 입술 사이를 다시 가르고 들어가 제 숨을 불어넣었다.

 

온기가 가득했던 방의 온도가 높아지자 해준은 얇은 티 안으로 밀어 넣어져 있던 제 손을 거둬가며 그저 품 안으로 아이의 마른 등을 가득 끌어 안았다. 젠장, 참지 못하고 앞서나간 제 손길에 순간 작은 몸이 떨렸던 것이 느껴졌기에 해준이 낮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가슴팍에 가득 안겨있는 등을 열이 오른 제 손바닥으로 달래듯 반복해 쓸어 내렸다. 쿵쿵 울려댈 것이 분명한 제 심장 근처에 뺨을 대고 배려 없는 입맞춤으로 차오른 숨을 쌕쌕 뱉어대는 옅은 소리와 제 등을 끌어안고 티 끝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후회로 가득한 말을 혀 밑에 누르면서도 해준은 아이가 제 품안에서 어둠에 지쳐 잠이 들 때까지 아쉬움이 남은 제 입술을 결이 좋은 머리카락 위로 한참을 문지르고 있었다.

 

 

“…강해준, 미친 놈.”

 

 

아이는 이미 이르게 저와 아침을 챙기고 학교에 간 상태였다. 30살과 17. 너무나 먼 차이는 아이가 한 살씩 여물어갈 때에도 좁혀지지 않을 간격이었다. 하지만 제 품에서 눈을 떠 잠이 미처 다 깨지 않은 채 제 등을 끌어안아 오는 부드러운 몸이나, 전보다 더욱 상기된 얼굴을 하며 제게 나직이 웃어오는 하얀 얼굴이나,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현관에서 배웅해주는 제게 나가려다 머뭇거리던 몸을 돌려 뒤꿈치를 들고 뺨에 입을 맞춰주는 입술이 그 모든 것을 잊게 할 만큼 달콤했다. 팔꿈치 밑에 깔려 흐트러진 원고도 잊게 할 만큼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혼자 덩그러니 서재에 남아 있는 시간이 이젠 자신에게 어색하기만 했다.

 

 

 







 

삼시세끼

강해준X장그래


w. 빙다리 핫바지

 

 





<3. 세 끼>



 

 

 

 

 

 

 

막 겨울에 들어서 아직 어둑어둑한 아침의 공기를 크게 들이쉬며 그래는 입 밖으로 뽀얀 김을 내뱉었다. 길을 걸으며 눈앞을 흥건히 가리고도 남아 차가운 바람결에 흩날려지는 김을 바라보다 턱 끝에 머문 머플러를 코끝까지 끌어올리고 그 속에서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 아저씨 냄새. 갓 세탁한 천에서 나는 향기 속에 은은하게 머문 해준의 향기를 이젠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익숙해졌다는 것은 이렇게 또 다른 의미가 되어 그래에게 다가왔다.

아침에 눈을 뜨니 늘 비워져 있던 옆자리가 아닌, 단단한 가슴팍이 닿아와 잠결에 잊고 지냈던 어리광을 부렸던 것 같았다. 아픈 저를 재우고 소파에서 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일어나면 온기가 없었던 전과는 달라 저보다 큰 등을 끌어안으며 작게 웃었던 것도 같았다. 입김처럼 뿌옇게 김이 서린 침 기억들 중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하나는 그런 제 머리카락 위로 부드럽게 닿아오던 따뜻한 입술었다. 그 부드러움은 숨도 못 쉴 만큼 간지럽고, 뜨겁고, 저를 애타게 했던 어젯밤의 입맞춤을 생각나게 해 그래는 꽁꽁 언 귓가에도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주머니 속에 감춰두었던 손을 꺼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보고 싶다.”

 

 

아저씨는 뭘 하고 있을까. 늘 일을 하던 서재에서 오늘도 원고지 위로 결이 좋게 깎아놓은 연필을 움직이고 있을까. 아직 들어가보지 못한 공간이 궁금했지만 이미 과할 만큼 곁을 내어준 그로 충분했다. 좋은 사람이야, 단지 서투를 뿐이지. 형이 제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 맞아. 좋은 사람이야. 제게는 너무도 좋은 사람이라 어젯밤 머뭇거리던 그를, 치기로 붙잡아 곤란하게 할 자신이 원망스러울 순간이 올지도 몰랐다. 서툴러서, 그래서 좋아. 그래는 여전히 색이 예쁜 밤색의 머플러 끝을 만지작거리며 홀로 집에 있을 해준을 머릿속에 그렸다. 제가 사놓은 허브티를 따뜻하게 우려 한 모금 마시며 허브티처럼 은은하고 덤덤한, 제가 가장 좋아해 마지 않는 글을 쓸 해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머뭇거려졌다. 집으로 돌아가면 오늘도 아저씨의 책을 읽고 싶어. 당장이라도 등을 돌려 돌아가고 싶은 발을 떼려 부러 머릿속으로 해가 저물고 난 후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뭉게뭉게 떠올리는 그래의 휴대폰이 윙윙 울려왔다. 계절이 바뀌고 오랜만에 보는 형의 이름이었다.

 

 





 

강해준! 여기!”

 

 

 

아득했던 기억을 눌러내리고 겨우 한 글자씩 원고지 위로 써 내려가던 해준은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연락에 주저 없이 집 앞의 카페로 발을 옮겼다. 곧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바깥 날씨와는 달리 포근한 카페의 내부 공기가 유리문을 여는 순간 훅 불어와 해준의 뺨을 스쳐왔다. 반가운 손짓으로 저를 작게 부르는 목소리에 바람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장갑을 낀 손으로 매만지며 맞은 편 빈 자리에 몸을 기울였다. 여전히 까만 눈동자와 사람 좋은 웃음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오늘 밤에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제게 웃어줄 작은 아이를.

 

 

 

잘 지냈어? 좀 더 보기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일은 잘 해결됐어?

. 생각보다 빨리 정리될 것 같아서. 그동안 연락도 자주 못해서 미안하다. 우리 그래 맡겨놓고 나도 참 못났지.”

“…, 다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 괜찮다.”

 

 

 

늘 곁에 있었던 아이의 이름이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울컥 가슴께가 저려왔다. 당연히 아이에게 다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머릿속 한 구석이 옹졸하게 굴어 장갑을 벗어둔 손으로 제 앞에 놓인 물컵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나는 네 이름을 한 번이라도 이렇게 다정히 불러본 적이 있었던가. 친구를 앞에 두고 더듬어가는 기억엔 늘 자신을 먼저 다정하게 불러오는 아이의 해사한 얼굴뿐이었다.

 

 

 

무리한 부탁 들어줘서 정말 고맙다. 오랜만에 우리 그래 얼굴 보니까 좋더라. 전보다 살도 조금 오른 거 같고. 키도 더 큰 것 같고.”

“…불편할 것도 없었어. 알아서 잘 하니까.”

해준이 너도 좋아할 줄 알았어. 착한 아이라니까.”

“…말도 잘 하고, 싹싹하고, 사람 잘 챙기고그렇더라.”

그래?”

 

 

 

미리 주문해놨는지 따뜻한 라떼 한 잔이 제 앞에 놓이자 물컵을 매만지던 손을 옮겨 잔 손잡이를 쥐며 해준이 중얼거렸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아이의 칭찬뿐이었다. 한 번도 낯간지럽게 누군가를 평가한다거나 칭찬해본 적 없는 자신을 생각할 겨를 없이 해준은 제 앞에 놓인 익숙한 라떼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이 마시는 거라곤 라떼 뿐인 것을 모를 리 없는 친구의 배려였건만 쉽게 입이 가지 않았다. 커피에서 오르는 뜨거운 김만큼이나 모락모락 나는 허브티 생각이 났다. 마시지 않고 빤히 시선만 내리는 해준을 보며 친구는 동그란 눈을 해보였다. 자꾸만 하얀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그건 좀 신기하네.”

뭐가?”

우리 그래 생각보다 과묵하거든.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던데. 수도승이라고.”

“………”

생긴 거랑 다르게 꽤 무뚝뚝하기도 하고.”

“……..”

그렇다고 싹싹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만큼 속으로 많이 삭히는 애야. 힘들면 말도 안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잃은 게 많아서 그런지 함부로 손 내밀지도 않고.”

 

 

 

친구의 말에 해준은 가만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앉아있는 친구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가라앉은 눈동자가 해준에게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친척 형과 살았던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입이 짧아서 내가 해준 끼니 아니면 잘 먹지도 못해. 내가 해준 게 제일 맛있대, 귀엽지. 금세 표정을 바꿔와 개구지게 말해오는 친구의 얼굴에 해준은 피식 바람이 새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제 앞에서 그동안 삼시세끼 내내 까맣고 보석 같은 눈을 크게 띄우며 맛있다고 뺨을 붉혀온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 귀여운 모습은 저만 아는 비밀로 두고 싶었다.

 

 

 

오늘 보니까 그래가 네 머플러 하고 있더라. 해준이 너 겨울 내내 매고 다니는 그 구닥다리 밤색 머플러 말이야.”

“…비싼 거야, 인마.”

하하, 알아. …그래서 고맙다고. 우리 그래 챙겨줘서.”

“………”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게 고맙다 말하는 친구에게 해준은 미처 대답할 수가 없었다. 친구의 생각과는 의미가 많이 달라진 제 마음이 걸려왔다. 우리 그래 추위 많이 타도 그런 거 귀찮다고 일절 안 하던 애인데 같이 밥 먹으면서도 안 풀고 있더라고. 둘이 꽤 많이 친해졌나 봐. 제가 아이에게 건네준 이후부터 줄곧 귀찮은 기색 없이 하고 다녔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말들이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달랐었다는 아이의 말이 해준을 콕콕 찔러왔다. 너와 나는 처음부터 어쩌면 줄곧 달랐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들이 기억 끝에 아롱아롱 매달려 엮어왔다.

 

 

 

최대한 빨리 우리 그래 짐은 가지러 갈게.”

“…?”

오늘부터 그래 친가에서 지내게 했어. 그동안 많이 불편했을까 봐.”

“…,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아무리 친해도 지금껏 너무 불편해서 죽는 줄 알았다, 하고 말할 녀석 아니잖아, . 안 그래도 혼자 있는 거 좋아하는 놈인데 내가 무작정 맡겼으니까.”

“…….”

 

 

 

우리 그래도 너한테 인사 못한 게 걸리는지 표정이 그렇게 좋진 않아서 빠른 시일 내로 같이 가던가 할게. 해준은 친구가 자리를 뜨고 나서도 한참이나 일어나지 않았다. 탁상 위로 올려둔 손 사이엔 한 입도 대지 않고 그대로 온기를 잃어버린 뿌연 커피만이 놓여있었다. 본래 이렇게 될 일이었음에도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온 상황에 자신은 부러진 연필심처럼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밤엔 아이와 함께 할 저녁을 생각하고 있었고, 잠이 들기 전엔 날이 추워져 혹시나 열이 있진 않을까 확인을 하려 했었다. 까맣고 깊은 눈동자로 올려다 봐온다면 다정한 말은 꺼내지 못해도 하얀 이마 위에 입을 맞춰줄까도 고민했었다. 모두 헛된 계획이 되어 있었다. 지금이 아닌, 예정대로 사흘 뒤에 아이가 떠나게 됐었다면 저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도 딱히 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이별을 맞이하기 전, 얼굴 한 번 제대로 다시 보지 못하고 멀어졌다는 사실이 해준의 어깨를 내리 눌러왔다.

 

 

 

집으로 돌아가 간단하게 식탁 위에 한 끼 식사를 차렸다. 수저 한 쌍, 밥 그릇 하나, 국 그릇 하나. 늘 혼자 먹던 대로 찬 몇 가지. 식탁의 남은 자리가 크게 느껴져 몇 숟가락 들다가 해준은 그대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개수대에 찬 그릇 수는 얼마 되지 않아 설거지도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다. 여유로웠다. 씻고 나와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비비며 거실로 나오자 그동안 느낄 수 없던 싸늘한 온도에 해준은 작게 기침을 했다. 한 컵에 꽂혀있는 칫솔 중 하나는 물기 없이 버석하기만 했다. 얇은 니트 차림으로 서재에 들어가기 전 늘 하던 대로 부엌으로 돌아가 머그컵 하나를 집어와 쌓여있는 커피믹스 통 위로 손을 올렸다. 커피 말고 허브티는 어때요, 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여져 해준은 잠깐 고개를 돌렸으나 있는 것이라곤 어두운 거실 뿐이었다. 커피믹스의 봉지 위엔 그 동안 손을 대지 않아 흰 먼지가 드문드문 쌓여있었다. 손을 옮겨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아이가 저를 위해 사다 놓은 허브티 병을 집어 컵 안에 쏟아 내렸다. 뜨거운 물이 그 위로 부어질 때마다 색만큼이나 은은한 향기가 피어 올라왔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컵을 옆에 두고 글자가 쓰여지다 멈춘 원고지를 들여다보며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연필을 가만 굴려댔다. 싸늘한 서재 안이 김을 따라 온도가 오르는 듯 하는 느낌이 들어 해준은 턱을 괴며 가만 눈을 감았다. 혼자는 늘 익숙한 일이었다. 날카롭게 깎아놓은 연필처럼 늘 날이 서있는 자신은 혼자인 편이 나았고 앞으로도 분명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방문자 한 명이 제 사적인 성벽 안으로 들어와 따뜻한 허브티 한 잔을 놓고 가기 전까지는.

 

해준은 책상 옆에 가만 엎어둔 휴대폰을 집어 연락처를 살폈다. 장그래, 라고 적힌 이름을 빤히 바라보다 엄지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한참 살펴보던 장그래라는 글자 대신 그 밑에 있는 이름이 번호와 함께 까만 화면으로 떠올랐다.

 

 

 

“…강해준입니다.”

 

 

 

벌써 마감하신 거예요? 하고 묻는 목소리에 해준은 제 앞에 놓인, 적히다 만 원고지를 서랍 안으로 밀어 넣으며 수화기 너머의 익숙한 사람에게 낮게 답했다. 저번에 제안하신 로맨스 소설 말입니다. 집어 넣은 원고 대신 한쪽에 두었던 새 원고지를 꺼내 책상 위로 올려두며 해준이 말을 이어갔다. 그 제안 아직도 유효합니까.

 

 

 

[강 작가님, 저번엔 로맨스 소설은 절대 안 쓰신다고 했잖아요.]

“…, 갑자기 그렇게 됐습니다.”

[저희야 좋죠! 아직도 팬 레터로 작가님 로맨스 소설 문의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그럼 하던 원고는 잠깐 멈추고 원래 기간에 맞춰서 새 원고 보내겠습니다.”

[시간 촉박하지 않으시겠어요? 이 참에 공지하고 마감 살짝 늦추는 건,]

아뇨.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남으면 모를까. 해준이 끝말을 덧붙이자 수화기 너머로 작은 탄성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가 끊어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미처 누르지 못한 이름 위로 해준이 손가락을 올리려다 거둔 채 책상 위로 그대로 뒤집었다. 새 원고지는 빳빳한 모양새로 각이 져 촛불처럼 은은한 스탠드 불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해준은 원고지 옆에 놓아둔 연필을 쥐려다 그 너머로 손을 뻗어 온기가 느껴지는 컵 손잡이를 쥐어 입가에 대었다. 뜨겁지 않고 딱 알맞게 따뜻해진 온도가 입안으로 넘어와 은은한 향기를 목 너머까지 밀어주고 있었다. 그 향기와 똑닮은 얼굴을 떠올리며 해준이 원고지 위로 서걱서걱 글씨를 그려내기 시작했고 왼손에는 여전히 컵 손잡이가 쥐어진 채였다. 원고지가 몇 장 남지 않을 때까지 해준의 오른손 끝엔 허브향이 맴돌았다.

 

 

 

해준은 김이 어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거울에 담긴 제 얼굴에선 닦지 않은 물기가 뚝뚝 턱으로 모여 세면대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한 삼일 간 엉망으로 새벽을 보낸 터라 턱에는 얼기설기 수염이 자라있었다. 마지막 문단을 남겨둔 채 쓰러지듯 잠을 청한 것이 나름 도움이 되었는지 침침하던 혈색은 꽤 본디 색으로 돌아와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서랍 속에서 개어둔 수건을 꺼내 얼굴의 물기를 훔치고 이어 머리카락 위로 비비적댔다. 비어있어야할 바구니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수건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이렇게 정신 없이 글을 써본 것이 언제였던가 싶었다. 갓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열정으로 돌아간 것처럼 써 내려가는 글씨는 멈추질 않았고 넘어가는 페이지는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욕실의 칫솔 하나엔 물기가 없이 버석하기만 했다. 

욕실 밖을 나서 가만 열린 서재에 곧 마무리가 지어질 원고지를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돌려 부엌으로 가 새 머그컵을 꺼내곤 그 안에 익숙한 몸짓으로 찻잎을 쏟았다. 삼일 내내 끼니를 걸렀어도 손에서 놓지 않던 향기였다. 가만 따뜻한 물을 부어 티스푼을 젓는 동안 내다본 창문은 깜깜한 밤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오늘이 며칠이더라.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잃은 머리가 시간을 가늠하지 못하고 덜컹거렸다. 그저 벽에 걸려 째깍거리는 시계가 밤 10시를 살짝 넘은 시간을 가르키고 있는 것만을 인지하게 했다.

 

 

 

“…끝날 때 즈음이려나.”

 

 

 

이 시간을 조금 넘기면 늘 아이가 도어락 번호를 눌러왔었다. 기다리지 않으려 해도 늘 기다리는 듯 서재 안에서도 귀가 미리 소리를 향해있어 때때로 연필을 쥔 채 당황스러워 했었다. 오늘은 날이 추웠을까. 머플러는 제대로 했을까. 잠에서 깬지 얼마 안된 머릿속이 허브향과 함께 온통 하얀 얼굴로 점철되어 있었다. 가슴 한 구석이 저릿했다. 왜 그 흔한 전화 한 번을 걸어보지 못하고 네 향기로 가득한 것을 손에 끼고 지내고 있는 건지, 다시 혼자가 된지 시간이 조금 흘렀어도 익숙지 않은 통증이 해준을 괴롭혀왔다. 아마 네가 받지 않아 길어지는 신호음을 듣기가 두려운 거겠지. 혹시나 대화가 이어진다면 네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을까 겁을 먹은 거겠지. 해준은 이미 외워져버린 아이의 번호를 곱씹으며 매마른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손바닥 안을 따뜻함으로 녹진하게 하는 컵을 쥐고 다시 기계처럼 서재로 발걸음을 돌릴 때 희미하게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자세로 멈춰 해준은 일직선으로 뻗어있는 복도끝 현관을 바라봤다. 발걸음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리움에 못이겨 제가 만들어낸 소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쉽게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들고 있던 컵을 협탁에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착각이 아님을 알려주듯 발걸음소리가 문 앞에서 멈추고 도어락이 눌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급하게 누르는지 몇 번 틀려 띠-하는 오류음을 내왔다. 해준이 현관으로 한 걸음 발을 뻗자 도르륵 잠금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맞았다, 하는 작은 속삭임이 이어 들려오고 삼일 내내 꾹 닫혀있던 문이 열려왔다.

 

 

 

“…아저씨.”

 

 

 

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엉켜 하얀 이마를 보이고 목에 둘러 있는 익숙한 밤색 머플러가 어설프게 흐트러져있었다. 눈이 내렸는지 머리카락과 코트자락에는 하얀 얼음조각과 물기 또한 어려있었다. 숨이 차 저를 부르고도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이나 현관에 서서 저를 바라봐왔다. 여전히 까맣고 깊은 눈동자가 속눈썹이 까맣게 내려앉은 눈꺼풀에 자주 덮여졌다. 촘촘한 속눈썹 위에도 물기가 어려 물방울이 아롱거렸다.

 

 

 

“…하아아저씨…, 잘 지내셨,”

“…장그래.”

“………?”

 

 

 

처음으로 먼저 나직이 불러준 제 이름에 찬바람으로 빨갛게 오른 얼굴로 안부를 물어오려던 아이가 멍한 표정을 지어왔다. 그래야. 추운 겨울에 내리는 눈이 포근하듯 딱딱한 목소리에 품어진 다정함을 다시 불러진 이름에서 느끼곤 아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래로 늘어뜨린 눈썹과 눈꼬리가 꽃이 핀 것처럼 붉어져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저씨…”

“…이리 와.”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현관에 있던 아이의 몸이 해준의 목에 매달려왔다. 어설프게 걸려있던 밤색 머플러는 결국 뛰어온 몸짓에 못 이겨 바닥으로 떨어졌고 제 품으로 가득 단단하게 들어 안은 몸이 찬 기운을 옮겨왔다. 하지만 그것도 금세 심장이 맞닿은 체온 사이에서 녹진하게 녹아 들어갔다. 아이는 여전히 마르고 작았다. 잠깐 떨어져 있는 사이 살짝 여윈 것 같기도 했다. 해준은 아이를 가득 품에 안은 채 제 머플러를 두르고 있어 유일하게 따뜻한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작은 몸이 움찔대며 더욱 제 어깨를 끌어안아 왔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그래.”

“…보고 싶어서…”

 

 

 

미처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두고 온 사람이 생각나 학교에 갇힌 채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해준을 곱씹었는지 그래는 가늠할 수도 없었다.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그리고 금요일. 지내왔던 시간 만큼 억누른 마음을 꺼내어 들고 때마침 내리는 눈길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뛰어왔다. 아직도 몸에 좋지 않는 커피를 마시고 있을까. 그동안 늘 함께했던 식사는 홀로 제대로 하고 있었을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늦장을 부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도어락의 번호 앞에서,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해준의 앞에서 그것들은 모두 눈송이처럼 녹아내렸다. 뜨겁고 꺼슬한 입술이 여린 목 부분의 살결에 비벼지자 몸을 움찔거리며 그저 아직 따라잡기도 힘든 너비를 가진 해준의 어깨를 가득 끌어안았다. 그리운 향기를 찾아 밤색 머플러만을 꼭 쥐고 있었던 3일을 대신하듯 그윽한 온기가 온몸을 부술 듯이 자신을 끌어안아주고 있었다.

 

 

 

그래야.”

 

 

어깨에 묻었던 고개를 들자 전보다 꺼슬해진 얼굴이 다정하게 이마를 맞대어왔다. 내가 없던 사이에 끼니를 거른 걸까. 스치는 코끝은 여전히 갸름해 심장을 덜컹거리게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론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어느 새 그래의 눈가에 고여 축축하게 뺨을 적셔갔다. 다정하게 뺨을 쓸어주는 손길에 그래가 해준의 목에 매달린 채 아롱거리는 웃음을 내뱉었고, 그 웃음이 멈추기도 전에 소리는 해준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밀려들어오는 혀끝에서 향긋한 허브향이 흘러왔다.

 

해준의 품에 가득 들린 채 들어선 침실은 여전히 아늑한 공기로 그래를 반겨왔다. 해준의 뺨을 쥐고 그보다 높은 시선에서 내려다보며 그래는 어설픈 입맞춤을 그리웠던 시간 만큼 해준의 얼굴로 쏟아냈다. 부드러운 침대보가 등에 닿아오고 온도가 높은 손길이 교복셔츠 틈 사이로 파고들어갔다. 아저씨. 두터운 코트가 해준의 손길 몇 번에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뺨과 목덜미로 쏟아지는 입맞춤에 곧고 긴 해준의 뒷목에 매달려 그래는 제 다리 사이로 가득 찬 두터운 몸을 끌어안았다. 아저씨부르면 주인이 찾아와 그래의 입술 틈 사이로 뜨거운 숨을 선물해주었다. 늘 투박하고 꼿꼿한 모양이었으나 제게는 처음부터 다정했던 모양으로 다가오는 온기를 받아 마시며 그래는 차오르는 숨을 몰아 쉬려 마른 가슴팍을 자주 움직였다.

 

 

 

“…흐으…, 아저씨….”

“…내 이름 불러 봐.”

“…해준, ,해준…”

“…그래.”

 

 

 

대답인지 자신의 이름인지 판단할 수도 없게 할 만큼 뜨거운 온도가 맨살을 훑으며 지나가 그래는 제 입가를 해준을 끌어안던 손으로 틀어막았다. 닿아있는 몸은 틈새가 없이 달라붙어 있었다. 벌어져있던 그간의 사이를 메우려는 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렇게 서로의 밤을 지새워갔다.

 

 

 

*    *    *

 

 

 

 

 

 

 

“…여긴 들어가면 안 된다고…”

괜찮으니까 들어와.”

그래도, 아저씨…!”

 

 

 

해준은 서재 안으로 들어오기를 머뭇거리는 그래의 허리를 끌어안아 어젯밤처럼 들어올린 채 살짝 문틈이 벌어져 있었던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를 끌어안은 팔뚝으로 천이 걸쳐지지 않은 맨다리의 피부가 느껴져 해준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제 셔츠를 입어 벌어진 틈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그래의 흰 목덜미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작은 입맞춤에도 파르르 떠는 몸이 어젯밤처럼 군데군데 붉어져있는 것이 흰 셔츠 너머로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만 같았다. 몇 걸음 못 가 들려졌던 몸이 어디엔가 앉혀지자 그래는 그제야 힘주어 해준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 내릴 수 있었다. 거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책이 방안 빼곡히 수놓아져 있어 여전히 부끄러워 붉어진 귀를 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꼭 비밀의 정원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해준은 책상에 앉힌 채 두리번거리며 책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는 그래의 사이로 팔을 짚고 상체를 숙여 가만히 상기된 뺨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제게로 돌아온 까만 눈동자가 만족스러운 듯 이내 입술 위로도 입을 맞추자 달콤하게 살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왔다. 피부가 엷어 금방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만지작거리려는 그래의 손을 쥐며 해준은 그보다 시야가 낮은 의자 위로 그제야 제 몸을 내렸다.

 

 

 

여긴 네가 처음이야.”

“………”

사실 이 집 전부 네가 처음이지.”

“……아저씨…”

나에게도네가 처음이고.”

 

 

 

해준의 표정은 처음 만난 순간처럼 무덤덤하게, 변화가 그렇게 많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나 제 손을 쥐어오는 손길, 그리고 이내 그 제 손을 끌어가 뜨거운 입술로 닿아오는 것 모두에 처음보다 깊은 다정함을 넘겨주고 있었다. 그래는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손을 움직여 해준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저와는 다르게 꺼슬하게 수염이 자란 턱과 뺨이 느껴졌다.

 

 

 

“…왜 그랬어?”

“………”

 

 

 

해준은 그래의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고 그래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랬어. 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내게 보여줬어. 왜 내게 웃어 보이고, 왜 내게 다정히 굴었어. 왜 나를 흔들었어. 많은 질문이 들어있는 단 하나의 물음이었다. 제 뺨을 쓰다듬는 손바닥 깊숙이 입술을 묻으며 다시 한 번 그래에게 물었다. 왜 그랬어.

 

 

 

“…아저씨 글이 좋아요. 아저씨가 직접 말해주는 것 같아서.”

“……..”

처음부터 그랬었어요.”

“……..”

그냥 처음부터 달랐었어요.”

 

 

 

낮고 조용히 속삭여오는 그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해준은 이내 작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다시 그 손바닥 깊이 입술을 비볐다. 아이에게선 오롯이 자신의 향기가 나고 있었다. 맞아, 처음부터 그랬어. 아이와 있을 땐 어떤 누구와 함께 있을 때와는 달랐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함께 있을 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아이가 되었고 감정 하나 쉽게 감추지 못하던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그 끝에 다다라 아이를 그저 아이로만 바라보지 못했던 제 시선들이 떠올랐다. 그 때만큼은 함께 어른이었다. 해준은 그래의 두 손을 제 손으로 쥐고 제 얼굴을 손등에 비볐다. 가느다란 손끝이 뺨을 매만져왔다.

 

 

 

“…네가 어른이 된 모습이 궁금해.”

“…….”

“…네가 어른이 되면 분명.”

 

 

 

자신과는 달리 진솔한 아이. 시간이 흐르면 네가 매만지는 내 뺨처럼 꺼슬한 수염이 나는 어른이 되겠지. 헐렁하게 걸친 제 셔츠가 딱 들어맞게 자란 어른이 되겠지. 내가 잡고 있는 손도 금세 뼈대가 굵어지고 조금 더 큰 모양을 해 보이겠지. 만일 글을 써내려 간다면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글을 써내려 갈 것이라는 걸 보지 않아도 해준은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제게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해준은 그래가 앉아있는 곳 바로 옆에 놓인, 마무리만이 남은 원고지를 내내 입을 맞추었던 작은 손에 가만 들려주었다.

 

 

 

네가 허락해준다면 뒤를 이어 쓸게.”

“………”

대신 마지막은 네 대답이어야 해.”

 

 

 

그래는 해준의 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 제 손에 들린 원고지를 소중한 것을 쥐듯 한 장씩 읽어 내렸다. 해준은 그런 그래를 가만히 바라보며 어젯밤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차가워진 머그잔을 들어 한 모금씩 입안으로 삼켰다. 온도는 차가웠지만 여전히 향기로웠다. 바둑돌처럼 까만 눈동자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고 깜빡임의 횟수가 줄어들어갔다. 아이는 글을 읽어 내렸고 해준은 아이의 감정을 읽어 내렸다.

 

 

 

[오늘 책에서 봤는데…]

[삼시세끼를 함께 한다는 것엔 큰 의미가 있대요.]

[그래서 식구. 먹을 식에 입 구라는 한자를 써서 그래서 식구래요. 신기하죠.]

 

[처음부터 달랐었잖아요.]

 

 

 

글을 읽어 내리는 그래의 입가에 미소가 돌 때마다 해준의 입가에도 따라 미소가 돌았다. 모두 저와 해준의 이야기였기에 그래는 읽어 내리면서도 자주 눈꼬리를 붉혔고 그럴 때마다 해준의 입술이 그래의 맨 무릎에 달래듯 닿아왔다.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은 원고지의 마지막 장만이 남아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에요.]

[…가고 싶어?]

[………]

[…굳이 나갈 필요 없어.]

[…?]

[그러니까 내 말은…]

 

 

 

미처 이어지지 못한 글자들에서 눈을 떼고 그래가 해준을 바라봐왔다. 오늘이 예정대로라면 마지막 날이었다. 자신이 그에게서 떠나야할 마지막 날, 오늘. 이미 비워진 지 오래인 머그컵을 그래가 앉은 책상 옆에 내려놓고 해준이 다시 그래의 하얀 손을 쥐어왔다. 식어버린 향기마저 따뜻하게 할 만한 온기가 느껴져 왔다.

 

 

 

그러니까 내 말은…”

“……….”

네가 내 옆에 있어줬으면 한다는 거야.”

 

 

 

해준은 미처 원고지로 옮겨 적지 못한 말을 꺼냈다. 많은 무게가 실린 말이었다. 아이에게 분명 짐이 되겠지. 13살 차이, 좁혀질 수 없는 격차를 넘어서 자신과는 다르게 아직 어른의 문턱을 넘지도 못한 그래에게 미처 닿지 않은 일도 앞으로 많을 것이었다. 해준은 그래의 손을 다시 한 번 힘주어 쥐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기적이게도 자신은,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 인생이었던 글을 내어주고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었다.

말이 없는 그래에게 고개를 들자 하얀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제 입술 위로 세상 어느 것보다 달콤하고 보드라운 것을 닿아왔다. 사랑스러운 소리를 내며 가까이 떨어진 입술 사이로 달큰하고 따뜻한 숨이 닿아왔다. 아이는 여전히 제 얼굴 가까이에서 웃고 있었고 어느 때보다 불그스름하게 뺨과 귀끝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저씨한테 허브 향기 나요.”

“…장그래.”

배고픈데 같이 밥 먹을까요…?”

 

 

 

웃음기 가득인 아이에게 이마를 맞대며 해준이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맞잡고 있던 손을 놓아 이젠 저를 놀리듯 굴어오는 아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해준이 제 허벅지 위로 당겨왔다. 밥은 조금 있다가. 제 몸짓에 놀란 그래가 어깨를 잡아오자 해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게 돌려 대답한 괘씸한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섞어지는 혀 사이에선 해준이 그래의 대답을 기다리며 내내 삼켰던 허브의 향기가 막 우러난 티처럼 향긋하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삼시세끼를 함께 한다는 것. 가장 사적이고 중요한 부분까지 함께 공유한다는 것.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삶의 마지막까지 변치 않을, 사랑스러운 것임을.

 

 

해준그래 합작 네 살 차이

Keyword: 마지막.

삼시세끼 세 끼–fin.

삼시세끼

 

 










 

마침내 해준그래 마지막 합작이네요. 정말 많은 기분이 듭니다.

처음 해준그래 합작 네 살 차이가 생겼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사실 가장 편하게 쓰는 글은 석율그래였지만 드라마 보는 내내 좋아했던 건 해준그래였거든요.

다른 분들 글 읽는 걸 되게 좋아해서 많이 뒤져보고 그랬는데 해준그래는 글이 얼마 없어서 많이 아쉬워하던 차에 제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세 분께서 해준그래 합작을 하신다는 말에 혼자 야광봉 댄스를 췄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벌써 작년일이에요. 시간 참 빠르죠?

 

그렇게 염탐하는 시간을 보내고 세 분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네 살 차이에 중간부터 합류하게 된 것은 아마 덕질하는 내내 잊지 못할 추억과 감사로 남을 것 같습니다. 제가 글 쓰는 속도가 생각보다 더디고 짧게 쓰지 못하는 불치병이 있어서 합작 내내 지각을 하는 바람에 (개쓰레기) 세 분께 정말 많은 민폐를 끼쳤는데 그 때마다 다정하게 보듬어주셔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세 분께 진심으로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무화님, 난나님, 단지님. 제가 세 분의 글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 지는 언제나 그렇듯 멘션으로 드릴 계획이오니 이점 양해부탁드려요(?))

 

합작하는 동안 세 분 글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했었어요. 각자의 문체로 풀어내시는 이야기에 흠뻑 취하고 또 감탄하고 또 끙끙 앓고. 3 3색이 잘 어우러진 합작이 아니었나 감히 생각해보는 바입니다. 해준그래 합작이라는 이름으로 세 분과 함께 할 수 있어 진심으로 영광이었습니다. 세 분께 민폐쟁이로 낙인만 찍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엉엉 ㅠㅠㅠㅠ 우럭

 

네 살 차이에서 추려낸 키워드 자체가 다양해서 각자 모두 색이 진하게 들어간 글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키워드로 글 쓰는 내내 즐거웠고, 각 키워드마다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해준그래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물론 항상 마지막은 해준그래 사랑해라! 햅삐엔딩해라! 로 귀결시키는 해피엔딩 성애자였지만 가끔은 달달하게, 가끔은 야하게, 가끔은 심각하게, 가끔은 무난하게, 그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렇게 해준그래가 멋진 커플링입니다, 여러분 껄껄걸. 키워드로 글 쓰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4번째 합작 키워드: 퇴근 <엽집 남자>는 풋풋한 마음을 담고 싶었어요. 사실 퇴근 하면 무조건 회식인데(?) 처음 드라마를 봤을 때 두 사람에게서 묘한 기류를 느꼈기 때문에(??) 분명 이건 원인터 입사 전에 뭐가 있다! 싶어서 상상하며 썼던 글이었습니다. 아마 둘이 한 집 살림하면서 사내커플인 거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장)


5번째 합작 키워드: 야근 <9 to 6 대신 All Night Long>는 야근의 반대인 나인 투 식스(칼출근 및 칼퇴근)와 엮어, 야근으로 대표되는 일벌레 해준과 일을 좋아하지만 적당한 걸 좋아하는 석율을 데려다가 쓴 짧은 글이었습니다. 워낙 석율그래가 드라마에서 밀어주는 브로맨스여서 그에 반항해보기 위해(?) 꽤나 즐겁게 쓴 기억이 납니다. 사실 사이에 수위높은 부분을 왕창 빼고 나니 글이 되게 짤막해졌습니다. 


6번째 합작 키워드: 잘 자요 <꿀Night> 이 키워드를 보자마자 생각난 말이 강해준의 "내일 봅시다" 이거였어요. 그런데 내일 보자는 말은 오늘은 이만하자는 말과 같으니까 말하는 사람도 되게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 봅시다가 아니고, 직접 한 침대에 누워서 하루의 끝까지 함께 한다면 잘 자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시작되어 쓴 글이 꿀나잇이 되었네요. 껄껄. 해준그래는 제 안에 당도 높은 조청과 같기에 제목엔 꼭 꿀을 붙여보고 싶었습니다. 


7번째 합작 키워드: 엘리베이터 <Elevating Relationship> 사실 7번 째 합작 키워드에선 꽤 애를 먹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워프하는 시대물을 써볼까 하다가도 늘 분량 고자라 15페이지 이상에서도 마무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원초적으로 돌아가서 엘리베이터의 단어 뜻부터 찾아봤습니다. 고조시키다, 상승시키다, 승진시키다 라는 의미를 따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해준그래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증진되는 것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풀어내자면 앞에선 늘 해준이 적극적이었고 그래가 휘둘리는 컨셉이었지만, 이번 만큼은 적극적인 그래에게 휘둘리는 해준이 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하. 


8번째 합작 키워드: 식사를 합시다

9번쨰 합작 키워드: 커피

10번째 합작 키워드: 마지막 <삼시세끼> 제가 티비를 잘 안봐서 식샤를 합시다를 안 봤어요... 그래서 그냥 제목만 보고 비슷한 삼시세끼로 제목을 설정한 후에 끼니를 함께 하면서 점점 서로 가까워지는 해준그래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늘 하고 싶었던 것이 무작위 키워드 3개로 3부작을 완성시키는 것이었는데 해준그래 합작에서 실현할 수 있게 되어 굉장히 성심성의껏 써내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중간 중간 꼭 넣고 싶은 대사와 문구, 컨셉을 미리 정해놓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틀을 짰어요. 그러다보니 아고물이 쓰고 싶고, 작가 강해준이 보고 싶고, 해준에게만 다정한 조금은 무뚝뚝한 그래 학생이 보고 싶더라구요. 처음은 잔잔했으나 마지막은 꼭 달달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시는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그게 참 궁금하기도 해요. 재밌게 보셨나요? 저희 네 명의 글에 즐거운 시간 보내셨다면 그것이야말로 저희들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와 기쁨이 아닐까 싶습니다. 4 4. 그 말 한 마디로도 큰 영광입니다. 시간 내어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합작은 여기서 마지막 발자국을 찍지만 해준그래는 영원할 거예요. 각자 모두 각자의 스타일로 해준그래를 그려나갈 것이고 다른 분들도 또한 해준그래를 각자의 방식으로 아껴주실 거라 믿습니다. 해준그래로 감사했고, 해준그래로 행복했습니다.

 

궁합도 안 보는 네 살 차이 해준그래, 부디 오래오래 사랑하길.

 

 

이번 삼시세끼를 마지막으로 해준그래 연재물 Romantic Senses로 개인적으로 찾아 뵐 것 같습니다. 늘 그렇듯 로맨스이며 원작에 충실한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함께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점핑큰절)

 

 

16.03.04 해준그래 합작 <네 살 차이>의 민폐쟁이 빙다리 핫바지 올림.

빙다리 핫바지 티스토리 http://bingdarihotbazi.tistory.com/



 

곧 해준그래 합작 <네 살 차이>의 글을 모두 엮는 소장본 표지 작업에 들어갑니다.

올해 하반기에 계획 중이므로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꼭 참여부탁드립니다.

 

해준그래 합작 <네 살 차이> 트위터 @1983X1987 https://twitter.com/1983x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