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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지키지 못한 약속 (w. 꽃단지)

 밤이 깊었다. 걸인들이 모여 사는 다리 아래도, 해준이 있는 궁궐의 돌담 안도 모두 어둠의 차지였다. 해준은 늘 곁을 지키던 호위 무사 대신 그래를 대동한 채 궁을 거닐었다. 감히 궁궐 안에서 임금에게 칼을 빼어드는 무모한 이가 있을 리 없었지만, 전쟁을 앞둔 만큼 혹여나 해준을 해하려는 자가 있을까 싶은 마음에 그래는 연신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걷기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해준은 연못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연못 가까이 마련된 정자에 걸터앉았다. 그래는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사방을 경계하며 검집을 꼭 쥐고 섰다. 해준이 그래를 바라보았다. 그래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

, 전하.”

 

 그래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자 해준은 말없이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떨어져 서있던 그래가 그의 명에 따라 해준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섰다. 가까워진 그래를 향해 해준이 팔을 뻗었다. 어깨에 한 손을 얹는가 싶더니 이내 그래의 얼굴로 옮겨갔다. 굵은 손가락이 볼 위를 감쌌다. 찬바람에 붉어진 뺨을 문지르자 그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붉은 소맷자락이 추운 겨울바람에 흔들렸다. 해준이 다른 손으로 그래의 뒷목을 감싸 천천히 제 쪽으로 당겼다. 그래가 손길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포개지며 그래가 눈을 감았다.

 

안 가면 안 되는 것이냐?”

 

 입술이 떨어지고, 해준은 돌아올 답을 알면서 괜한 질문을 던졌다. 이틀 뒤면 전쟁이었다. 변방에서 국경을 수비하던 병사 하나가 오늘 저녁 도성으로 찾아와 고하기를, 국경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했다.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에서 전쟁을 위해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했단다. 도성에서 훈련하던 중앙군은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국경 지역에 갈 예정이었다. 높은 직책은 아닐지라도 군대의 일원이었으니 그래도 응당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

 

전하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일입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 염려치 마시옵소서.”

 

 그래가 안심시키듯 웃었다. 그래는 언제나 단단한 미소를 지었다. 해준은 그 미소가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싸우러 전쟁터 한 가운데에 뛰어든 사람이 상처 하나 얻지 않을 수야 없다지만 누군가 그래의 몸에 박아 넣은 검의 흔적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 옆에 묶어두고 싶었다. 저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일일지라도 싸우지 말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래가 평생 제 칼끝에 누군가를 겨누고 자신의 목숨을 위험한 곳에 두며 살리라 스스로 그리 믿고 있다는 건 해준도 알았다. 싸우다 생긴 상처는 검을 잡는 이들에게 훈장과도 같다고 했다. 언젠가 왼쪽 팔과 어깨를 크게 다쳐왔을 때 그래가 해준 얘기였다. 팔 한 쪽에 흰 천을 칭칭 감고 누운 그래를 바라보며 해준은 안타까움에 얼굴을 찌푸렸고 그래는 오른팔이 아니라 다행이 아니냐며 다시 검을 잡을 생각에 웃었다. 그래는 평생을 이렇게 살겠다 스스로 정한 사람이었다.

 

그래야.”

 

 해준이 불렀다. 고개 숙였던 그래는 다시 시선을 맞췄다. 그래가 묘한 표정을 했다. 입술 끝에는 미소가 걸고서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을 했다. 해준은 그 표정에서 그래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전하께서 그리 부르시면 떠나기가 힘드옵니다.”

 

 내가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던가. 해준은 생각했다. 그래가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했으니 아무렇지 않게 보내주어야지 마음먹었는데 말이라는 건 뜻대로 나와 주지를 않았다. 결국 해준은 말하는 대신 그래를 따라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금세 결판나겠거니 했던 전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싸움이 치열해질 때쯤에는 비마저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 적군도 아군도 흠뻑 젖었다. 발아래 단단하던 흙은 물을 잔뜩 머금었다. 말발굽에 파인 땅에는 빗물이 고였다. 날이 저물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건만 태양빛을 가린 먹구름 탓에 하늘은 어두웠다. 싸움을 계속하기에 악조건이 분명했으나 그 사실을 신경 쓰는 병사는 없었다. 비에 젖은 탓에 뼛속 깊이 추위가 파고들었지만 그 역시 전장의 열기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병사들이 검을 빼어들고 싸우니 여기저기서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적을 향해 달려들며 내지르는 고함소리, 창이며 칼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소리, 거기에 투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까지 더해져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했다. 그리고 거기 그래가 있었다. 전쟁터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적을 벴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만큼 그래의 몸에도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

 

 한꺼번에 달려드는 적 두 명을 베고 뒤를 돌았을 때, 그래는 적군 한 명이 저를 노리고 칼을 휘두르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그의 칼은 그래의 옆구리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래는 지금껏 겪었던 전투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고통과 함께 찬 바닥으로 쓰러져야만 했다.

 

 

 

 

 

전하, 승리했사옵니다!”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말을 탄 전령은 하루 빨리 도성에 소식을 전하려 힘껏 내달렸다. 그러나 승전 소식에 기뻐하기도 잠시, 해준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사들로부터 그래의 전사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를 따르던 군사 중 누군가 말하기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고 했다.

 크고 작은 전쟁을 몇 번이나 치르고도 살아 돌아온 이였다. 그런 그래가 금방 돌아올 테니 염려치 말라 했다. 전쟁에서 이겨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도 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노라 약조하기에 정말로 살아 돌아 와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보내주고자 했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오겠다는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