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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 삼시세끼 中 두 끼 (W.빙다리 핫바지)



bgm. 브라운 아이즈- 루아흐(Ruach)



그래는 티가 나지 않게 고민스러운 얼굴로 뭔가를 휘휘 젓는 해준의 손을 바라봤다. 고소한 향이 해준의 손을 따라 흘러와 그래의 코끝까지 닿아오자 이내 굳어있던 그래의 표정이 흐물거리다 파득 다시 고민스러워졌다. 몸에 좋지도 않은 게 향기는 왜 이렇게 좋을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걱정스러운 말들이 그래의 도톰한 입술 안에서 몽글몽글 뭉쳐지다 한숨이 되어 흘러나왔다. 갈색 빛의 뽀얀 것을 내려다보던 해준의 눈이 그 한숨 소리를 따라 커피 향처럼 흘러 그래에게 닿았다.

 

 

 

그거몸에 되게 안 좋대요.”

알아.”

밥 먹고 마시면 살도 찐다는데…”

그것도 알아.”

입냄새도날 수 있어요…!”

“………”

그러니까믹스커피 말고 다른 건 어때요…?”

 

 

 

그래의 말에 해준은 빤히 그래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다 보란 듯이 한 입 제 입안으로 믹스커피를 삼켰다. 무덤덤한 얼굴로 짓궂은 짓이라니 평소라면 웃음이 나올 법도 했지만, 그 행동에 그래의 눈썹은 끝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양쪽으로 축 늘어져 잔뜩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준과 지내고 나서 그래가 알게 된 건 해준이 무덤덤한 표정과는 달리 자신에게 꽤 자상하다는 것과 건강한 식단,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그건 그의 생활에서 유일하게 어울리지 않는 믹스커피의 존재였다. 끼니의 끝에 항상 입가심을 하듯 버릇처럼 마시는 커피에 그래는 식탁 아래로 괜한 발만 동동 굴렸다. 다른 차들도 많은데 왜 하필 믹스 커피일까, 차라리 해준과 잘 어울리는 아메리카노였다면 조금 맘이 편했을까. 제 물음에 아직 대답하지 않은 해준을 빤히 올려다보며 그래가 눈썹을 늘여뜨리자 늘 그렇듯 식사 후 초에 불을 붙이던 그가 잔에 마저 남은 커피를 목안으로 벌컥 넘기곤 그래를 가만 내려다봐왔다.

 

 

 

지금 안 가면 지각일 텐데.”

“…그러니까 커피…”

“…다녀올 때까지 생각해보고. 얼른 가.”

 

 

 

이미 비어버린 커피잔을 내려다본 그래의 한숨이 더욱 짙어졌다. 이렇게 임시 방편으로 둘러대고는 자신을 보내고도 글을 써내려가는 동안 여러 잔의 커피를 들이킬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늘 얼마 자지 않고 일찍 일어나는 해준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 신발 앞 코를 퉁퉁 튀겨 신는 동안에도 그래의 표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커피 말고 다른 차는 어때요? 문고리를 잡고 나가면서도 제게 넌지시 까만 눈을 들어 묻는 그래에게 해준은 그저 벽에 기대 제 머플러를 두른 모양만을 꼼꼼히 살피다 고개를 까딱였다.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평소보다 기운 없는 목소리를 끝으로 문은 닫혀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왔다.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며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열리고 닫히는 희미한 소리마저 듣고 나서야 해준의 발걸음은 현관에서부터 느리게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곤 내내 무표정이었던 그의 입꼬리에 걸음마다 그래의 앞에서 쉽게 보여주지 않는 옅은 미소가 새겨졌다.

 

 

 

다른 걸로 한번 바꿔볼까.’

 

 

 

고작 믹스 커피 하나에 울상이었던 하얀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해지며 여느 날과는 사뭇 다른 해준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삼시세끼

강해준X장그래

w. 빙다리 핫바지

 

 

<2. 두 끼>

 

 

 

 

해준의 집에서 그래가 다니는 반경이 넓어지기까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에게 내어준 작은 방과 욕실을 거쳐 함께 식사를 하는 부엌에서 흔한 조형물 하나 없는 심플한 거실, 그리고 그래가 아팠을 때 너무나 쉽게 내어준 가장 사적인 해준의 방까지.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겨우 하나, 누구에게도 열어주지 않았던 그의 서재뿐이었다. 자신이 지금껏 써왔던 글을 읽으며 어느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제 가까이에 다가온 그래를 뒤늦게 알아챈 해준의 얼굴엔 허탈한 웃음만이 걸려있었다. 서재에 앉아 손가락 사이로 잘 깎인 연필을 굴리며 쓰던 글을 멈춘 해준은 가만히 그래가 제 집에서 지낸 날짜를 세었다. 고작 2주를 넘어가고 있는 날짜들이 머릿속에 머물렀다.

 

 

 

한 달, 한 달이랬지.’

 

 

 

그래가 돌아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도 더러 맴돌았다. 흐른 시간도 짧게 여겨졌지만 남은 시간들이 더더욱 짧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남은 시간 동안 아이는 자신의 어디까지 다가올까. 어쩌면 침범하지 말라 엄포를 놓았던 이곳까지 자신이 스스로 아이를 들일지도 모르는 생각이 들자 해준은 제 손바닥으로 뜨끈해진 눈가를 감추었다. 혼자만 가득했던 시간에 타인이 천천히 발을 들이는 것이 이토록 하루를 빼앗아갈 줄은 미처 몰랐다는 듯 구는 자신이 어색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뒤이어진 생각들은 의문스럽게도 아까까지 내내 시무룩했던 아이의 얼굴로 가득해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해준은 다시 연필을 원고지 위로 놀렸다. 어차피 도로 지워야 할, 두서 없는 내용의 글자들이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그래는 수업시간 내내 교과서 모퉁이에 의미 없는 낙서들을 끄적이며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중이었다. 한 친구가 제게 말해줬던 것들 때문인지 해준이 즐겨 찾는 믹스커피를 대신할 방안이 쉽사리 생각나지 않았다. 어른들한테 커피는 체력 포션이랬어. 때문에 교과서에는 글자 대신 잔뜩 동그란 회오리만 가득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조금 더 나은 걸 마시면 좋을 텐데. 잠이 잘 오는 허브티라든가, 아니면 똑똑 떨어지는 드립 커피라든가. 개인적으로는 늘 식탁 위에 피우던 향초처럼 향기로운 허브티를 마시는 해준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혹시 너무 참견하는 건 아닐까.’

 

 

 

종류의 선택과는 별개로 치밀어오르는 생각은 꼭 한 가족이 서로 두서없이 구는 것처럼 해준에게 참견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런 자신이 해준에게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를 위해 하는 것만큼은 어쩐지 참견이라 불리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만큼은 어린 치기라 치부되어도 납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생각의 끝과 함께 오늘따라 짧기만 한 수업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의 종이 울리자 무언가 적어 내려가던 그래의 팔이 제 친구에게 끌려 교실 밖으로 나아갔다. 주인 없는 책상의 책에는 허브티라는 글씨가 쓰여지다 꼬리를 늘인 채 모퉁이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   *   *

 

  

 

제 시간에 들어와야 할 아이가 늦자 해준의 발이 초조하게 현관 근처를 서성거렸다. 몇 번을 건 휴대전화는 길게 이어지다 메시지를 남기라는 말로 맺어질 뿐이었고 시간은 훌쩍 넘어 1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진작 마무리했어야 할 글은 도중에 멈춰 문이 열린 서재의 책상 위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 자리를 지켜야 할 자신은 평소라면 잘 손대지도 않을 휴대폰을 쥔 채 버석거리는 입가에 마른 세수를 하는 중이었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왜 이 시간까지 돌아오질 않아. 묻고 싶은 말들을 혀 밑으로 감춘 채 해준은 신발장에 짝 없이 덩그러니 외롭게 혼자 놓인 제 구두를 눈에 담다 결국 손에 잡히는 코트 하나를 걸치며 문밖을 나섰다. 당장 문밖을 나서는 것만으로도 온도가 낮아 해준의 걱정스러움은 배가 되어 잘생긴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며칠 전까지 깊게 앓았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 빠르던 엘리베이터도 오늘따라 느린 듯 올라와 버튼을 연거푸 누르는 손가락이 급하기 짝이 없었다. 문이 열리면 한 걸음에 내려가 단지 주변을 살피고 늘 아이가 걸어오던 길을 살필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져 코트 주머니 안에 머문 손엔 애꿎은 땀이 맺혀왔다.

 

마침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려던 찰나, 널따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거울에 얼굴을 비추며 머리 위에 쌓인 물기를 털다 뒤돌아 제게 말갛게 웃어왔다. 뺨을 동그랗게 말아 봄꽃처럼 물들인 얼굴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모양새였다. 입가까지 가린 밤색 머플러는 이젠 저보다 아이에게 둘러지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 아저씨…! 어디 가시는

어딜 갔다 이제 와?”

잠깐 어디 좀 들렸다오- , 아저씨…?”

 

 

 

저를 보고 반가움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인사해오는 팔을 억세게 잡아 끌어 당겼다. 처음 닿은 거친 손길에 놀라 토끼 눈이 되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은 빨갛게 익어 군데군데 눈이 붙었다 녹은 자국을 묻히고 있었다. 이 눈길을 한참 걸어왔는지 머리카락엔 털지 못한 눈 녹은 물방울들이 맺혀 시선을 빼앗아갔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평소보다 낮아진 해준의 목소리와 찌푸려진 미간에 그래의 까만 눈이 점점 걱정으로 물들여져 갔다.

 

 

 

그게배터리가 다 나가서…”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를 해야 할 거 아냐.”

“…죄송해요, 걸으면 금방일 줄 알았는데걱정하셨어요…?”

“…내가 얼마나…!”

 

 

 

머뭇거리며 추위에 빨개진 입술로 미안함을 담아 건네오자 분명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던 속이 꼭 아이에게서 물기를 빼앗아 온 듯 식어갔다. 마른 팔을 쥐었던 손 위로 차갑게 언 아이의 손이 닿아왔다. 그 빨간 손끝을 내려다보던 해준이 낮게 한숨을 쉬며 눈을 꾹 감았다 뜨곤, 이내 제 손으로 저보다 작은 손을 쥐어 당기며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 안에 가득 아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옮아왔다. 제 속보다 아이의 온도가 더 중요했다.

 

 

 

내일 학교 갈 생각하지 말고 오늘 내 방에서 자.”

“……?”

또 전처럼 내내 앓지 말고 내 방에서 자라고.”

“…안 돼요. 또 소파에서 주무실 거잖아요.”

 

 

 

현관에서 급하게 신느라 뒤축이 구겨진 구두를 벗고 제게 잡혀있는 팔을 이끌어 당기자 발끝에 매달린 운동화를 겨우 벗고는 그래가 해준의 손을 힘주어 쥐어왔다. 저 때문에 해준을 불편하게 하는 건 며칠 내내 앓는 것보다 싫은 일이었다. 작게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올려다봐오는 그래의 눈에 아까보단 풀린 얼굴로 해준이 마주봐왔다.

 

 

 

“…그럼 내가 너랑 같이 자겠어?”

“…그냥 제방에서 자면

안 돼.”

그럼같이 자요.”

 

 

 

다시금 잡은 손을 당겼지만 고집스레 다른 손도 겹쳐 잡고 버티는 그래를 내려다보는 해준의 눈이 당혹감에 젖어 들어갔다. 그건 더 안 돼. 차갑게 말하는 해준의 말에 그래는 더욱 해준의 팔을 제게 이끌며 눈썹을 늘여왔다. 얌전히 잘게요. 코도 안 골게요, ? 평소답지 않게 쉽게 고집을 꺾지 않으려는 듯 되묻는 그래를 내려다보다 해준은 눈을 질끈 감고 아까보다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이내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느리게 그래의 목을 둘둘 감은 머플러를 풀어 내렸다. 우선 씻고 와. 해준의 대답에 내내 침울해하던 그래의 얼굴이 한 겨울바람에 꽃 핀 듯 활짝 개어왔다. 욕실로 부산스레 향하는 그래의 작은 뒷모습을 보다 해준은 버릇처럼 두 손을 들어 마른 세수를 했다. 기다린 만큼 어딜 다녀왔는지, 왜 늦었는지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보기 좋게 아이의 사과 하나에 져버리곤 쓸데 없는 허락까지 내어준 자신이 이젠 낯설지도 않았다. 물소리가 나는 욕실문을 바라보다 천천히 부엌으로 가 해준은 작은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제게 말하면서도 작게 코를 훌쩍이던 얼굴을 떠올리며 누구에게 받았는지도, 또 어디 뒀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생강레몬청을 찾으려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벌써 두 번째로 자신은 제 범위를 그래에게 쉽사리 내어주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이 걸릴 만큼 차게 얼어있었던 얼굴이 따뜻한 물에 녹아 이젠 보기 좋은 혈색으로 물들어져 나왔다. 마시기 좋게 따뜻한 머그컵 윗부분을 쥐어 손잡이를 잡을 수 있게 건네자 향긋한 레몬차의 향기에 그래의 입술 끝이 막을 길 없이 위로 향해왔다. 아직 말리지 못해 머리에 걸쳐놓기만 한 수건을 바라보다 그 뒤로 돌아 해준은 저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은 그래의 머리카락을 비볐다. 제가 할 수 있는데. 말과는 다르게 감추지 못하고 한 톤 높아진 목소리가 내내 기다리느라 인상이 풀릴 일이 없었던 해준의 얼굴에 미소를 옮아주었다. 그거나 마셔. 뜨거운 온도를 후후 불어 식히는 입술은 아마 동그랗게 말려 도톰해진 모양을 할 것이라는 걸 보지 않아도 해준의 머릿속에 사진처럼 그려졌다. 한 모금 먹은 후엔 언제나 식사를 할 때마다 보여주는 얼굴로 저를 마주봐올 것이라는 것도 이제는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맛있어요.”

얼른 마시고 자.”

 

 

 

그래의 머리카락이 보송하게 말라 부스스해질 때까지 해준의 큰 손은 멈추지 않고 작은 머리 위에서 움직였다. 부끄러운 듯 여기저기 솟은 머리카락을 내리누르는 그래의 뺨은 아까보다 조금 더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어른은 2, 아이는 1. 제가 혼자 있을 땐 손을 댈 일이 없어 새 것인 채로 놓여있던 감기약을 하나 툭, 밀어 손 안에 담고 그 알이 그래의 목 안으로 넘어갈 때까지 해준의 몸은 그 옆에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소파에서 주무시면 안 돼요.”

“………”

“…같이 자는 거예요, ?”

“…그래, 알았어. 빨리 자라.”

 

 

 

혼자 눕기엔 큰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는 제 티 소매를 작게 잡아오는 그래의 보챔에 한숨 같은 해준의 대답이 이어졌다. 몇 번 까만 눈을 어둠 속에서 깜빡이다 이내 고른 숨소리를 내는 그래의 얼굴을 보는 그의 눈동자엔 생각이 가득했다. 자신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닐까. 이마 위로 내려온 결 좋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왜 이렇게 눈에 밟히지.”

 

 

 

가까워진 뺨에 고른 아이의 숨이 닿아오자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손은 작고 하얀 뺨을 그러쥔 채였다. 추위는 사라지고 온기와 부드러움만이 가득이었다. 왜 이렇게 네가 신경이 쓰일까. 아이가 없는 동안 꼭 발 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생경한 감각들은 어느 글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왜 이렇게 네가. 입술 사이의 틈은 어느 새 겨우 손가락 한마디일 뿐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닿을 듯 말듯한 거리는 해준이 몸을 떨어뜨리자 금세 어느 것보다 멀어졌다. 어느 것보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뺨을 쓸던 손은 이제 싸늘한 공기 속에 떨궈진 채였지만 잠깐 닿았던 체온을 기억하는 듯 손끝이 따끔따끔 저려왔다.

 

 

*   *   *

 

  

 

괜찮다는 그래를 억지로 앉혀 밥이 아닌 죽을 먹인 건 해준의 의지였다. 역시나 살짝 열 기운이 있는지 유난히 하얀 뺨에는 붉은 기가 있어 해준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약 먹고 다시 자. 번거롭게 두 번 끼니를 준비하는 해준의 뒷모습을 보며 그래는 어떤 날처럼 눈썹을 늘어뜨리곤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그냥 밥 먹어도 돼요. 용기 내어 웅얼거리는 말에 돌아온 건 앞머리 사이로 눈썹 한 쪽을 씰룩이는 해준의 얼굴이었다.

 

 

 

다른 거 하지 말고 얌전히 자.”

“…아저씨 책 읽고 싶은데…”

“…그런 거 보지 말고 웬만하면 그냥 자.”

 

 

 

흰 쌀죽을 뜨는 작은 손에는 힘이 없었기에 어제 내내 아이를 기다리느라 끝내놓지 못한 분량을 채우려면 지금이라도 서재에 들어가 작업을 해야 하는 해준의 발이 쉽사리 식탁 근처에서 떠나질 못했다. 중간쯤 그래의 그릇이 비었을 때가 돼서야 식탁 한 켠에 약 한 알과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두곤 겨우 해준은 제 몸을 그래에게서 돌릴 수 있었다. 남기지 말고 다 먹어. 그릇은 식탁에 그대로 두고. 빤히 입술을 바라봐오는 그래의 눈동자에 더 잔소리를 뱉을 것 같았던 해준의 도톰한 입술이 꾹 다물어져 이내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서도 신경은 여전히 꼭 닫힌 문 너머 부엌 쪽을 향해 있어 해준의 손은 원고지 위에서 자꾸 멈추기를 반복했다.

 

겨우 한 페이지를 썼을까, 작은 슬리퍼 소리라도 들렸어야 할 밖이 조용하자 도리어 시끄러운 것보다 더 해준의 신경을 긁어댔다. 잘 깎아놓은 연필을 몇 번 써보지도 못한 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문만 뚫어져라 노려보다 이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저 혼자 빙글 한 바퀴 돌다 멈추었다. 문을 열고 부엌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갈 때마다 향긋한 향기가 코끝을 찔러와 해준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늘 마시던 믹스커피 고소한 향보다 몸을 따뜻하게 하는 향기는 곧게 뻗은 작은 등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 뜨거워…!”

 

 

 

생각지도 못한 제 목소리에 놀란 듯 컵을 쥐던 손을 파뜩 튀어와 해준도 더러 놀라 그래의 손을 와락 움켜쥐었다. 컵에서 넘친 뜨거운 물에 데인 듯 빨갛게 익은 피부가 가만히 있던 애꿎은 해준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급하게 손을 끌어 싱크대의 물을 틀어 담가도 붉어진 피부는 제 색을 찾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미간이 절로 찌푸려져 왔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저거…”

왜 쓸데 없는 짓을 해!”

 

 

 

그래는 제게 처음으로 소리를 지르는 해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늘 정적이고 조용한 사람에게서 나온 고함소리는 그래의 몸을 뻣뻣하게 만들고도 떠다니는 훈훈한 공기를 차갑게 했다. 마치 처음 만난 순간의 공기와 같은 온도였다. 왜 말을 안 듣고…! 이어 쏟아져 나오려는 고함에 해준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움츠러든 작은 어깨가 또 제 말문을 막아왔다. 제게 있었다면 쓰라렸다 금세 잊혀질 흉이었지만 제 앞의 아이가 가지고 있으니 둘도 없이 가슴팍 한 구석을 짓이기는 못된 자국처럼 느껴져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평온함을 띠기 어려웠다.

 

 

 

“…죄송해요, 몰래 두려다 놀라서…”

“………”

“…피로에 좋은 차래요. 커피보단 저게 좋을 것 같아서그래서 일단 사와 봤는데…”

“…장그래.”

“…좋아하실지 싫어하실지 몰라서그러니까 혹시 맛이 없으면…”

“…장그래.”

 

 

 

한참 해준의 얼굴에 박혀있던 눈동자가 울 듯 내리 떨어지고 어젯밤 찬 바람에 얼었던 콧망울처럼 눈꼬리가 붉어져갔다. 그럼에도 고집스레 눈물 방울 하나 흘리지 않는 촘촘한 속눈썹을 내려다보다 해준은 물기가 가득한 그래의 손을 제게로 끌었다. 손 봐봐. 메마른 목 틈새로 빼내 갈라지는 말이 겨우 그런 말 한 마디라는 게, 이제는 부엌을 가득 메운 허브티의 향기가 자신을 어지럽게 했다. 어젯밤 눈 오는 거리를 한참 걸어와 제게 건네주려 했던 이 마음에 답한 말이,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그 말이 아닌 짧고 짧아 투박스럽기 짝이 없던 것이었다는 사실이 하루가 끝날 때까지 머릿속을 두드려댔다.

 

 

  

 

 

 

결국 오늘도 채우지 못한 원고지만 내려다보다 여전히 새것처럼 뾰족한 연필을 내려두고 해준은 걸음을 옮겼다. 약을 먹고 잠에 든 건지 어둠이 짙게 내린 침대 위엔 제 책을 손에 쥔 채 옆으로 기울 듯 누워있는 작은 몸이 보였다. 침대 가까이 다가가는 해준의 발걸음엔 소리가 없었다. 반쯤 펼쳐진 책을 쥐어 협탁에 두고 이불을 끌어올려 고르게 움직이는 어깨 위를 덮을 때까지 하얀 옆 얼굴 위로 해준의 곧은 눈길이 닿았다. 그 옆에 앉아 마치 어젯밤처럼 이마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이 마저 닿은 곳은 손등의 하얀 패드였다. 열로 부어오른 부분 위에 연고를 발라주고 패드로 감쌀 때까지 오가는 말이 없었던 낮을 기억하며 해준은 그 손을 쥐어 제 손바닥 위에 올렸다.

 

 

 

“…장그래.”

 

 

 

내내 아이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아이였어야 했었다. 마냥 작게 보려 노력했던 얼굴은 제게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네가 내게 장그래였지.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아니면 너와 처음 식사를 함께 했을 때부터? 그도 아니라면 내가 네게 곁을 내어주던 그 때부터였을까. 늘 온전히 지켜왔던 모든 것들이, 표정과 말투, 일과와 눈동자까지 네가 온 순간부터 새로 쓰려 펼친 원고지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해준은 고개를 숙여 그래에게 다가갔다. 언젠가 그랬었던 것처럼 따뜻하고 고른 숨이 뺨에 닿아오고 입술과 입술 사이엔 손가락 한 마디의 거리뿐이었다. 가만 고개를 내리며 나른히 그래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해준의 코끝이 그래의 콧망울에 닿아왔다. 살짝 벌어져 아이의 고른 숨만큼이나 따뜻한 숨을 입술 위에 뱉던 해준의 입술이 이 사이로 깨물렸다. 더 이상 가까워지지 못하고 다시 거리를 벌리려 하자 유리알처럼 반들거리는 눈동자가 해준을 마주봐왔다.

 

 

 

“…멈추는 거예요…?”

“…멈춰야 하니까.”

“…왜요…?”

“………”

“…왜요….?”

“…안 멈추고 닿으면달라지는 게 너무 많으니까.”

 

 

 

제 손등에 감겨오는 그래의 손은 어젯밤의 온도처럼 차갑지 않았다. 따뜻하고 뜨거운 손길이 해준의 손등을 덮어오고 아직 가까운 입술 틈 사이에서 그 온도보다 더욱 뜨거운 숨이 섞여 들어갔다. 서로의 눈동자를 까만 어둠 속에서 좇고 그 속에 녹아 든 감정을 찾으려 애를 썼다.

 

처음부터 달랐었잖아요.

 

그래의 한 마디에 해준은 제 손등을 덮은 작은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맞추었다.

 

그래, 처음부터 달랐어.

 

그리곤 이내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던 입술 틈이 막힘 없이 벌어지며 메워져 갔다.

 

네가 내 안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나는.

 

도톰한 입술들이 벌어지며 뜨거운 서로의 혀를 얽어 맸다. 제 뒷목을 그러쥐며 입안을 훑어오는 해준의 목에 그래는 팔을 두르며 차오르는 숨을 안으로 삼켜냈다. 입술이 떨어져 마찰음을 낼 때마다 어리고 밭은 숨이 해준의 입안으로 삼켜져 사라졌다. 어설프고 작은 혀 위로 해준의 뜨거운 혀가 엉켜 보다 높은 온도를 나누었다. 해준이 제게 입술을 건너 새 숨을 불어줄 때마다 건너오는 허브티의 향기에 그래는 파르르 떨리는 제 눈을 내리 감았다.

 

 

 

 

 




해준그래 합작 네 살 차이

Keyword: 커피.

삼시세끼 두 끼–fin.

Next 삼시세끼 세 끼.

 






 마지막 합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점핑큰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