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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해준그래]단련 (w.무화)

 

 

 

 

bgm. Her OST - Some Other Place 

 

 

 

 

 

 

 

 

 

 

단련

 

* 미생 강해준 x 장그래

* 궁합도 안 보는 나이, 네 살 차이 (@1983x1987)

합작 : 9제. 커피

 

 

 

 




예고에도 없던 비 소식이다.

바쁘게 스치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망연히 빗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잠깐 쉬는 게 좋을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실수를 몇 번이나 행하다 결국 대차게 혼나고서야 퇴근을 했다.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부산스럽게 서성 이지 말고 빨리 퇴근하라며 배려하던 짙은 다크서클 덮인 중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장그래는 떨어져 내리는 비를 피해 다소 사람이 적은 카페로 몸을 옮겼다. 메뉴판 속 다양한 커피의 이름을 바라보며 말문이 막힌 채로 서 있자 손님, 하고 재차 묻는 주인의 목소리에 그는 가장 기억에 남던 이름 하나를 더듬더듬 짚어가며 주문을 하곤 가장 구석진 자리에 등을 기대며 앉아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잡히는 커피잔을 둥글게 매만지며 빗물을 피해 인상을 구긴 채 뛰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다 눈을 돌리자 시야에 가득 차는 익숙한 얼굴에 모르는 새에 이름이 흘렀다.


“강대리님?”


축축하게 젖은 채 빗물을 피해 다급히 카페 아래로 몸을 숨긴 남자는 그 익숙한 얼굴의 강해준이 맞았다. 귀에 걸려있던 블루투스를 서류 가방에 구겨 넣듯 집어넣으며 품 안에 지니고 있던 다소 덜 젖은 듯한 종잇 자락을 털어내고서야 카페로 들어서는 몸은 종소리를 울리며 익숙하게 메뉴판을 둘러보고 있었다. 주인과 안면이 있는 듯이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대화에는 어색함이 없었다.  


“장그래씨?”


혹시 했는데 역시 장그래씨네요. 다소 놀란듯하면서도 꽤나 반가운 표정으로 남자는 반대편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언제 시선이 마주쳤는지도 모르게 속전속결로 다가온 남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식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을 바라보다 다시 눈을 마주했다. 아직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퇴근했습니까? 이상이 이 근처 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아, 질문이 너무 길었나요.”


원인터에서의 계약직이 끝나고 많은 것이 변해가고 이미, 많은 것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변함없는 얼굴로 눈앞에 앉아 있는 인물은 사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변하는 듯 그 익숙함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덮쳐오는 질문 해일에 말문이 막혀 대답 없이 굳어 있는 모습을 보곤 멋쩍은 듯 웃으며 몇 번이고 축축해진 머리를 매만지던 남자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 했다. 요즘 원인터의 주 거래 계약 시장들과, 간간이 껴 있는 익숙하고 친숙한 이름의 장백기, 한석율, 안영이의 소식들. 그리고 입술 끝을 밀어 올리는 반가운 이름들의 결혼 소식과 입술 끝을 굳히는 이의 소식 하나도.

“아, 그리고 이거. ”

청첩장입니다. 과장 직급 달고 가장 늦어서 부끄럽지만 장그래씨와 이상 식구들 모두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물론 부담 주려는 건 아닙니다. 새하야디 하얀 순백의 카드 위에 놓인 남녀의 실루엣. 성격만큼이나 깔끔한 청첩장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여자였었으면, 이라던가 허무맹랑한 현실 불가능의 생각은 하지 않고자 했다. 그러나 포기까지 이어지던 그 끝의 비 내린 흔적을 급하게 지우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아직 이곳에는 해가 뜨지 않았다.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물이 마르지도 않았고, 흙바닥 위에 고인 빗물은 줄어들지 조차 않았다.


“그럼, 오차장, 아니 오부장님 그리고 김과장 한테도 안부 전해주세요. 또 봅시다, 장그래씨.”

 

누군가 나가고 있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가 힘차게 울리고 빠르게 손끝이 식는다. 입에 닿는 커피가 식은지는 오래였다. 누구의 취향이었는지도 모를 커피는 혀끝에 단맛만 남기고 속을 뒤집고 울렁였다. 처마 밑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공포심을 들게 할 만큼 커다란 이명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귓속은 물에 잠긴 듯 철렁이는 파도소리만 들렸다.


“손님 반대쪽 자리 치워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두 분 커피 취향이 같으신가 봐요.”


익숙한 듯이 친숙한 말을 건네며 커피잔을 치우고 반대편의 테이블을 닦아내는 주인장의 미소는 사려 깊었다. 그러나 혼자 남아 앉아있던 남자는 그것이 몹시 슬퍼서 한입 채 마시지 못한 커피를 치워달라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같은 커피 취향, 그제야 장그래는 어렴풋이 기억에 남던 커피의 이름을 알려 준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이 커피보단 이 커피가 좀 더 취향에 맞을 것 같네요, 장그래 씨한테는.’


남자와 남자. 현실 불가능이라 여기어 홀로 바라보기에만 만족했던 맹목적인 감정. 사랑이란 이름으로 정의하였던 소용돌이치는 감정. 그 수많은 감정들, 그 낯설음이 시려워 장그래는 아주 오랜 시간 처마 아래서 눈물을 집어삼켰다. 홀로 남아 적시는, ​혀 끝에 여직 남은 차가운 커피의 향이 짙게 퍼졌다.